“2002년 여중생 장갑차사망 사고때 美軍, 사죄 아닌 해명…”

  • 입력 2009년 5월 8일 02시 56분


■ 당시 美2사단장 회고록

“2002년 여중생 장갑차사망 사고때 美軍, 사죄 아닌 해명으로 역풍불러”

2002년 6월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한 ‘미선,효순 양 사건’ 당시 주한미군 제2사단장을 지냈던 러셀 아너레이 예비역 중장이 당시 상황과 소회를 담은 ‘생존(Survival·사진)’(아트리아 출판사)이란 책을 펴냈다. 621쪽짜리 이 책에서 저자는 2005년 여름 멕시코 만을 강타한 허리케인 카트리나 재난 당시 합동 태스크포스(JTF-Katrina) 사령관을 지내며 겪은 경험담을 주로 담으면서 한국 경험도 5쪽에 걸쳐 소개했다.

2000년 9월 워싱턴 국방부에 근무하다 2사단장 발령을 받은 그는 미선 효순 양 사건에 대해 좁은 도로에서 장갑차 운전병의 시야가 제한된 ‘최악의 시기에, 최악의 상황에서 발생한 사고’라고 지적했다. 특히 이 사건은 한국이 월드컵 개최로 국제적 주목을 받고, 6·25전쟁 때 생존해 한미관계를 잘 아는 정치인들 대신 반미와 북한에 유화적인 젊은 정치인들로 교체되던 시기에 발생하는 바람에 반미세력의 주장을 확산시키는 발화점이 됐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사건 처리 과정에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군 교범에 따라 공식발표를 공보담당 소령에게 맡겼는데 사과가 아닌 ‘해명 모드’로 임해 사고 발생 시 깊이 사죄하는 자세를 보여야 하는 한국 문화에 비춰 볼 때 (결과적으로) 큰 역풍을 초래한 실수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소수의 반미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꼬투리를 잡혔고 결과적으로 전국적인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며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2사단장 발령을 받은 당시 그는 건강검진에서 전립샘암 진단을 받았으나 부임을 강행했다. 영관장교 때 근무한 적이 있어 “한국 사람들을 잘 안다고 자부했고, 한국 문화와 전통도 존경해 왔다”면서 기쁜 마음으로 왔다는 것. 하지만 사건이 터지고 한 달 뒤인 7월 19일 이임식 때 “시위대가 미군 철수를 외치고, ‘아너레이는 살인자’라고 적힌 피켓을 보는 일은 정말 가슴 아프고 실망스러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시위대 때문에 이임사도 마치지 못했다”며 “시위대가 영내 진입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수십만 경찰병력을 가진 한국이었지만 소수의 경찰만 출동해 부사단장이 병력을 출동시킬 정도였다”고 말했다. “사건 당시 미군을 옹호하면서 돕겠다고 나선 사람은 단 한 명도 기억할 수 없다”는 뼈 있는 말도 남겼다.

또 “미군은 50년 이상 한국에 주둔했고 6·25전쟁에서 3만3000명이 목숨을 바쳤으며 10만3000여 명이 부상하는 많은 희생을 했지만 한국과 미군은 같은 공간(한반도)을 공유하면서도 문화적 교류를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는 “어떻든 당시 한국 경험을 교훈삼아 2005년 카트리나 구조작업을 지휘할 당시에는 참모들이 써준 자료 대신 직접 보고 파악한 것을 이재민들에게 솔직하게 얘기해 호응을 받았다”면서 “2002년 한국 사태나 2005년 루이지애나 사태에서 느낀 것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리더의 진실한 말 한마디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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