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이젠 ‘히틀러’ 보고 웃을 수 있다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5월 21일 02시 56분



뮤지컬 ‘프로듀서스’ 獨공연 화제… 건국60년 변화 보여줘
“베를린에서 아돌프 히틀러를 보고 웃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나올까.”
2001년 미국에서 초연돼 7년간 10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여 5억 달러가 넘는 매출을 올린 뮤지컬 대작 ‘프로듀서스’가 17일부터 독일에서 첫 공연을 시작했다. 공연 시작 당시 현지 신문 ‘베를리너 모르겐포스트’는 이런 의문을 제기했다.
독일은 지금까지 히틀러나 나치 등 아픈 과거를 떠올리는 단어는 물론이고 국가 민족 애국 등 전체주의와 연관되는 단어도 금기시하다시피 했다. 이 뮤지컬은 히틀러와 파시즘을 풍자하는 내용을 담아 이스라엘에서도 성공했지만 독일인들을 웃게 할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특히 나치 상징인 갈고리 십자장 사용을 금지한 법에 따라 공연 포스터도 수정해야 했다. 더구나 뮤지컬이 상연되는 곳은 히틀러도 가끔 와서 공연을 봤던 베를린의 아드미랄스팔라스트 극장.
하지만 뮤지컬이 무대에 오르자마자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관중석에서 웃음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왔다. 미국 뉴욕타임스 자매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20일 ‘베를린은 히틀러를 웃음으로 맞았다’는 제목으로 히틀러를 대하는 독일인의 태도 변화를 전했다. 독일의 한 소설가는 “미국인이 모든 것에 대해 웃을 수 있듯, 이제는 독일인도 그래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과거에 속박되지 않으려는 열망이 상대적으로 큰 젊은 세대는 공연장에서의 감정 표현이 스스럼없었다. 이런 변화에 대해 오이겐 부스 호펜하임대 교수는 “나치 과거로 인해 상처받고 구겨진 독일 국민의 영혼이 상당히 치유됐다”고 진단했다.
이 같은 변화 배경엔 23일 건국 60주년을 맞이하는 독일의 경제적 성취와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잿더미와 절망의 그림자, 수백만 명의 난민만이 남았고 사람들의 뇌리에는 나치의 만행에 대한 수치심과 죄책감이 가득 차 있었다.
분단된 독일의 서쪽에서 1949년 5월 23일 새 헌법이 만들어지고 독일연방공화국이 건국됐다. 이후 60년이 지난 지금 독일은 세계 최대 수출국이자 유럽 최대 시장으로 성장했다. 정치적으론 자유와 평화가 넘치는 민주주의 국가로 탈바꿈했다. 과거의 ‘업보’였던 분단은 20년 전에 풀리고 동서독 사이의 심리적 갈등도 해소 단계에 접어들었다.
부스 교수는 “60년간 이룬 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의 경험이 과거에 대한 수치심보다는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인이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이 있다’는 응답은 8년 전보다 두 배나 많아졌다. 나치 과거 때문에 아예 역사 문제를 외면하려는 경향도 사라지면서 최근 서점에서는 역사 관련 책 판매가 급증하고 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