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한 학교 주차장에서 케르르멘 바산고바라는 34세 여성이 살해됐다. 임신 8개월 상태에서 검은색 복면 차림의 괴한이 휘두른 칼에 찔려 숨졌다는 경찰 발표가 당일 저녁 방송 뉴스로 보도됐다. 대학원 원장인 바산고바 씨가 학교 내부 인사의 부정부패에 맞서다 신변의 위협을 받아 왔다는 분석도 덧붙여졌다. 그녀의 사진과 함께 동료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전국으로 전파를 탔다.
그런데 바산고바 씨는 이튿날 아침 멀쩡하게 출근했다. 주변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진 것은 물론. 알고 보니 살인사건은 경찰이 그의 목숨을 노린 범죄자를 잡기 위해 연출한 거짓이었다. ‘바산고바 씨의 폭로로 범죄가 들통 날 것을 겁낸 블라디미르 루킨 부학장이 두 명의 청부업자를 고용해 그녀를 죽이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꾸며낸 연극이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루킨 부학장은 그런 줄도 모르고 사건보도만 보고 청부업자에게 약속대로 9400달러를 건네려다 덜미를 잡혔다.
18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바산고바 씨 살해사건과 같은 함정 수사가 러시아에서는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바산고바 씨 사건만 해도 치밀하게 계획됐다. 그녀가 경찰과 모의한 대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지갑을 꺼내려는 순간 괴한 역을 맡은 남성이 칼로 찌르는 척하며 가짜 피를 주변에 흩뿌렸다. 괴한의 도망, 피해자의 병원 이송 등 모든 과정도 미리 준비된 각본대로 이뤄졌다.
수사당국은 허위 사실을 언론에 흘려 보도하게 한 뒤 이에 반응하는 용의자를 검거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경찰에서 수사관으로 일했던 예브게니 비셴코프 기자는 “수사 시 사건의 공범자를 유인하기 위해 기자에게 날조된 기사를 써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