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비즈니스 모델에 답 있다]<3·끝>전문가 17인이 말하는 과제

  • 입력 2009년 6월 25일 02시 55분


호황대비 한국기업 강점살린 ‘1등전략’ 짜내자

《한국형 비즈니스 모델은 아직 미완성이다. 세계 경제위기에서 ‘뚝심’을 발휘하고 있지만 보완해야 할 점이 많다. 미국 일본 유럽 중국의 경쟁 기업이 고강도 구조조정 중이어서 한국 기업이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가능성도 크다. 시장환경이 시시각각 변하는 글로벌 경쟁의 특성을 감안할 때 한국 기업 특유의 강점을 바탕으로 ‘1등 전략’을 완성하고 실행해 나가야 할 때다. 한국형 비즈니스 모델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과제는 무엇인지 전문가 17명에게 들어봤다. 전문가들이 꼽은 모범사례도 함께 소개한다.》

○불황 뒤 호황 내다보며 말 갈아탈 준비 해야

장석인 산업연구원 신성장동력산업실장은 “현재 위기 속에서도 한국 기업이 잘하고 있지만 미래 성장 분야로의 기업 내 자원 이동이 잘 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미 성숙한 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리는 것보다 점점 떠오르는 시장에서 사업을 벌이는 게 기업 발전에 더 유리한데도, 기존에 잘하던 분야에서 세계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만 너무 매달린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도 “불황 뒤엔 호황이 뒤따르기 마련이므로 지금이 미래 경쟁력을 쌓을 적기”라며 “차세대 기술과 신수종(新樹種) 사업을 차질 없이 발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관련해 최근 주목 받는 기업이 코오롱이다. 코오롱은 지난해 3월 노동력이 많이 드는 섬유 부문을 분사시키고 새로운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폴리이미드(PI) 필름 합작회사와 엔지니어링플라스틱 전문회사인 코오롱플라스틱을 설립했다. 구미공장에 섬유 라인을 없애면서 신소재 라인을 깔아 직원들을 교육한 후 전환 배치하는 방식으로 인력 감원 없이 사업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그 결과 코오롱은 지난해와 올해 1분기(1∼3월)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릴 수 있었다.

유망 업종에서 기술력 있는 신생 기업을 사들이는 인수합병(M&A)은 신산업을 키우는 대표적인 방법인데도, 한국 기업은 너무 소극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지난해 한국의 M&A 규모는 417억 달러로 일본(1616억 달러)이나 중국(1590억 달러)에 훨씬 못 미쳤다.

○‘요소투입형’에서 ‘혁신기반형’으로 체질 개선

지난달 한국은행이 발표한 ‘2008 기업경영분석(잠정)’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이후 한국 기업의 매출액은 매년 4.3∼19.1% 꾸준히 증가했지만 영업이익률은 2004년 6.8%에서 지난해 5.0%로 떨어졌다. 세전순이익률은 2004년 7.2%에서 지난해 2.9%로 더 가파르게 떨어졌다. 덩치는 커졌지만 수익성은 나빠졌다는 의미다.

기업들의 수익성이 자꾸 나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혁신에서 이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간재 투입으로 생산량을 늘리는 방식의 구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남용 LG전자 부회장은 “두 자릿수 이익률을 내려면 창조적 아이디어를 첨단기술과 접목시킬 수 있는 혁신 기업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병남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서울사무소 대표는 “브랜드, 디자인 등을 통해 가격 프리미엄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제조업에서 ‘서비스산업 마인드’를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기아자동차의 경우 2006년 ‘디자인 경영’을 선언하고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피터 슈라이어 씨를 영입하는 한편 지난해에 미국 디자인센터를 완공했다. 기아차가 지난해 출시한 포르테, 쏘울, 로체 이노베이션은 모두 차별화되고 세련된 디자인으로 국내외에서 호평을 받았다. 세계 자동차 시장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기아차가 선전한 데에는 이 같은 디자인 혁신 노력이 컸다는 평가다.

○임원들의 권한과 책임 강하고 명확하게

유교적 전통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임원급의 권한과 책임이 분명치 않고 사장이나 회장 등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권한이 지나치게 막강하다는 점은 극복해야 할 한국 기업들의 특성으로 꼽힌다.

정현석 헤이그룹 한국지사 부사장은 “한국 기업에서는 임원들의 권한이 명확지 않다 보니 계획을 짜고 책임지는 일을 사장에게 미루는 일이 종종 발생한다”며 “그러다 보니 사장이 임원 일을 하고, 임원은 부장 때 하던 일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기업에서 수십 년간 일한 경험을 살려 통찰력을 발휘해야 할 임원들이 중간 간부의 역할을 하는 것은 기업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정 부사장은 특히 팀워크를 중시하는 한국의 기업 문화가 이번 위기 동안 더 강화됐을 것으로 분석했다. 대다수 기업이 ‘살아남기’를 목표로 삼으면서 팀장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성향이 커졌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문화는 호황이 오면 개인의 창의성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작용할 우려가 있다.

국내 기업들도 창의성과 자율성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SK에너지는 지난해 사내 조직을 R&M(석유정제 마케팅), R&C(자원개발 등), P&T(기술개발 등), CMS(경영지원 등)의 4개 부문으로 나눠 각각을 별도 회사처럼 움직이게 하는 ‘회사 내 회사’(CIC) 제도를 도입했다. 분권화와 책임 경영을 이루고자 하는 시도다.

○노사관계, ‘분배 게임’에서 ‘생산 게임’으로

이종훈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는 “한국의 노사관계는 아직도 분배를 어떻게 갈등 없이 해내는가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며 “이런 사고방식으로는 아무리 노사관계가 좋아도 ‘제로섬’ 게임에 머물게 된다”고 말했다. 기업이 아예 다른 나라로 공장을 옮길 수도 있고, 인재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기업은 인재를 빼앗길 수도 있는 시대에 이 같은 방식으로는 장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영진은 노조를 혁신의 파트너로 삼아야 하고, 노조도 경영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노조가 사업장 혁신의 주요 주체로 참여하는 기업으로는 노루페인트를 들 수 있다. 노루페인트도 과거에는 노사관계가 좋지 않았으나 1996년 안양공장에 화재가 나 기업 경영이 흔들린 것이 노조가 태도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이후 노조는 안전운동을 전개하고 무보수 철야근무를 하는 등 회사를 살리는 데 앞장섰으며, 경영위기가 지나간 뒤에도 생산성 향상과 이익 창출을 위한 혁신 캠페인을 벌였다.

산업부 특별취재팀

民-政-官 힘모아 ‘한국적 기업 생태계’ 만들어야

■ 기업 밖에선 무엇을…

한국형 비즈니스 모델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기업들만의 노력으로는 부족하고 정부와 정치권, 소비자들이 힘을 모아 ‘한국형 기업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안병훈 KAIST 서울부총장 겸 경영대학장은 24일 “최근에는 기업들 사이에서도 ‘지속가능’ 또는 ‘사회책임’ 등이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다”며 “환경오염, 지역사회 영향 등을 이유로 당연시됐던 정부 규제가 점차 명분을 잃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정치권이 기업의 발목을 잡고 있던 각종 규제를 적극적으로 풀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병남 BCG 서울사무소 대표는 “그린(Green) 산업에 정부가 직접 지원하기보다는 스스로 그린경영에 투자하는 기업을 찾아 과감한 세제혜택 등의 ‘당근’을 주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고 강조했다. 중소기업 대책 또한 단순한 연명을 위한 자금지원보다는 ‘기업 클러스터 활성화’ 등으로 기업 생태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한국 경제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인 ‘불확실성’ 제거에 대한 요구도 컸다. 현재 국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야 대치국면이 가장 대표적 사례.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보고서를 통해 △국지적 자산시장 불안 해소 △남북관계 경색 타개 △선제적 산업 구조조정 유도로 부작용 최소화 등을 단기정책 과제로 꼽았다.

자문에 응해 주신 분들(가나다순)

김국태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
김성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김영용 한국경제연구원장
김종석 홍익대 경영학부 교수
남 용 LG전자 부회장
변대규 휴맥스 사장
안병훈 KAIST 서울부총장 겸 경영대학장
유관희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이근희 한국생산성본부 생산성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이만우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이병남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서울사무소 대표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
이종훈 명지대 경영학과 교수
장석인 산업연구원 신성장동력산업실장
정현석 헤이그룹 한국지사 부사장
조영삼 산업연구원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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