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가장 붐비는 브로드웨이 타임스 스퀘어. 대로변의 화려한 고층빌딩 가운데 한 건물 외벽에 영국계 바클레이스캐피털의 로고가 선명하게 빛난다. 건물 저층부를 둘러싼 화려한 전광판 때문에 타임스 스퀘어의 랜드마크 빌딩 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건물은 지난해 9월까지만 해도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본사였다. 지난해 9월 영국계 은행 바클레이스가 파산보호를 신청한 리먼브러더스를 인수한 뒤 이 건물도 주인이 바뀌었다.
바클레이스캐피털 맨해튼 빌딩은 최근 본격화하고 있는 외국 금융회사들의 월가 공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을 주름잡았던 미국 월가는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영업력이 급속도로 위축되면서 안방 시장까지 외국계 은행들에 내주고 있다. 월가 안팎에는 “이러다가 월가도 일본에 무릎을 꿇은 디트로이트 꼴 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 섞인 목소리도 나온다.
○ 외국 금융회사 월가에서 각개약진
미국 정부의 구제금융으로 간신히 파산 위기를 모면한 미국 최대 보험회사 AIG는 이달 초 월가 한복판에 위치한 본사 건물을 한국의 금호종합금융과 뉴욕의 한인 부동산개발회사가 주도하는 컨소시엄에 매각했다. 66층짜리 건물과 19층짜리 건물 2개로 이뤄진 AIG 본사는 월가를 대표하는 빌딩 중 하나였다. 매각 가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4억∼5억 달러로 추정된다.
미국 금융회사들의 인력이 외국 금융회사로 빠져나가는 일도 이어지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정부가 월가 임직원들의 연봉까지 규제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은행은 최근 미국 금융시장에 대한 공략을 강화하기 위해 월가에서 90명의 중간 간부를 스카우트했다. 일본 노무라증권도 최근 135명의 직원을 추가로 늘리는 등 지난해 10월 이후 미국 내 인력을 10% 늘렸다.
외국 금융회사들의 월가 잠식은 수치로도 입증되고 있다. 미국 회사채 인수 시장의 금융회사별 점유율 순위를 보면 10년 전에는 상위 10대 회사 중 외국계 회사는 7위에 오른 스위스 CSFB가 유일했다. 그러나 올 들어 6월 15일 현재 상위 10위 내에는 바클레이스캐피털(영국) HSBC(영국) 도이체은행(독일) 크레디트스위스(스위스) RBS(영국) 등 5개의 외국계가 포함돼 있다.
크레디트스위스의 브래디 더건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금이 월가에서 크레디트스위스의 입지를 넓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정부 개입으로 손발 묶여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실라 베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 의장은 최근 미국 씨티그룹 경영진에게 전화를 걸어 부실자산 매각과 사업부 구조조정 속도를 높이라고 독촉했다. 미국 정부는 유동성 위기에 몰린 씨티그룹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34%의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가 됐다.
이처럼 미국 정부는 월가 금융회사들에 대한 감독과 규제를 점점 강화하고 있다. 월가는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영업의 제약을 받으면서 비즈니스가 크게 위축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