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개울 정도로 좁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의 함북 온성군과 마주보는 접경지역. 인구의 80%가 조선족으로 100여 년 전 청나라 때 강을 건넌 한민족의 후손이다. 중국어보다는 북한말을 더 많이 쓰고 강 건너 북한 마을에는 친척이 많다. 서로 국적만 다를 뿐 한 동네나 마찬가지다.
중국 시사 잡지 중국신문주간은 최신호(29일자)에서 웨칭 진 르포를 통해 북중 관계의 변화를 전했다. 이 곳의 양국 주민은 몇 년 전만 해도 이웃집 놀러가듯 국경을 넘어들었다. 양국 아이들은 두만강에서 여름에는 멱을 감고, 겨울에는 얼음지치기를 하며 어울렸다. 한쪽에서 기근이 나면 강 건너편에서 먹을거리를 날라 왔다.
주민들은 중국에서 1959~1961년 3년 대흉년이 들 때 북한에서 식량을 구했다고 입을 모았다. 국경을 간단한 절차를 통해 또는 그냥 '불법'으로 넘었다. 물자 왕래도 자유로웠다. 1970년대 중반까지 이 일대에서 파는 대부분의 쌀이 북한산이었다. 1980년대 중국 주민들은 북한에 가면 살게 없다고 푸념했지만 양국 주민들은 그래도 과거처럼 교류를 이어갔다.
변화는 1990년대에 본격화됐다. 북한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대기근까지 발생하자 식량을 챙겨 돌아가던 북한 사람들이 돌아가지 않았다. 탈북자가 하나둘 늘더니 1999년경에는 쇄도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2000년부터 탈북자 단속을 강화했다.
중국인도 북한에서 행동에 제약이 많아졌다. 2000년 북한 친척을 방문한 조선족 이영희 씨는 "마을을 지날 때마다 통행증을 받아야 했고, 시장도 마음대로 못 가고 사진도 찍지 못했다"고 말했다. 북한도, 중국도 이제 과거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다 국경에 장벽이 쳐진다. 2005년 이 지역의 국경방위 임무가 경찰에서 인민해방군으로 넘어갔다. 중국 측이 강을 따라 철조망을 쳤다. 감시카메라도 촘촘히 설치했다. 2003년 북한이 2번째로 핵확산방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한 뒤 중국 정부가 북한 핵을 위협으로 받아들인 조치라고 잡지는 해석했다.
두만강에 멱을 감고 물고기를 잡는 일이 점점 줄었다. 이제 주민들은 외지인에게 위험하니 강둑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4월 북한의 2차 핵실험 때는 지진으로 마을이 크게 흔들렸다. 이곳 주민들은 멀리 보이는 산의 뒤편에서 핵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옌변대학 동북아연구소 진창이(金强一) 소장은 "이곳 지하수가 방사능에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베이징=이헌진 특파원mungchi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