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대표적 여성 인권운동가가 살해되면서 국제사회 여론이 들끓고 있다. 체첸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사례를 조사해 온 러시아의 인권운동가 나탈랴 에스테미로바 씨(50·사진)는 15일 오전 8시 30분경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에 있는 자택 앞에서 4명의 괴한에게 납치됐다. 이어 약 9시간 뒤인 오후 5시 30분경 납치 장소에서 약 80km 떨어진 잉구셰티야의 나즈란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교사 출신인 에스테미로바 씨는 러시아 인권단체 메모리얼과 함께 1999년 2차 체첸전쟁 발발 이후 체첸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 등을 조사해 왔으며 2007년 ‘안나 폴릿콥스카야 인권상’을 받는 등 수차례 국제 인권상을 수상했다. 메모리얼은 “그를 살해한 자는 바로 람잔 카디로프 체첸 대통령”이라고 거명하며 맹비난했다. 친러시아 성향으로 알려진 카디로프 대통령은 체첸전쟁 당시 러시아와 함께 체첸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던 반군세력을 진압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국제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와 국제사면위원회(국제앰네스티)도 일제히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러시아 정부에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16일 독일을 방문 중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뮌헨에서 회담을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러시아가 범인의 체포와 처벌을 위해 모든 일을 다 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도 이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모스크바 인권운동가들과 만난 지 1주일 만에 끔찍한 사건이 벌어져 충격적”이라고 지적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은 “분노를 느낀다”며 신속하게 수사하라고 지시했다. AFP통신은 “러시아 정부의 신속한 움직임은 과거 인권운동가와 언론인이 피살됐을 때 느긋하게 대응한 것과 대조적”이라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해 5월 취임한 뒤 법에 의한 통치를 약속해 온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시험대에 올랐다.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인권운동가와 언론인들에 대한 공격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아직까지 범인들은 처벌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한편 AP통신은 16일 러시아 인권단체인 고문반대연합의 이고리 칼랴핀 대표가 체포됐다고 전했다. 칼랴핀 대표는 전날 메모리얼 등 단체와 함께 “체첸전쟁 당시 벌어진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당시 대통령) 등의 책임이 인정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에스테미로바 씨도 이 보고서 작성에 참여했다.
장택동 기자 will7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