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日 자민號는 갈곳 모르고… “내달 총선서 배지 잃을라” 여권 내부서 아소퇴진 요구 ‘당속의 당’ 파벌도 혼란 증폭 “침몰하는 배에서는 우왕좌왕하면서 살기 위해 먼저 뛰어내리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은 먼저 죽는다. 갑판에서 남 탓만 하면서 싸우는 사람도 있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일본총리가 최근 자민당 상황에 대해 꼬집은 말이다. 자민당이 다음 달 30일 총선에서 정권을 잃을 위기에 처하자 낙선 위기에 몰린 의원들을 중심으로 무질서한 분열상을 노출하는 등 극심한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당과 파벌을 중심으로 강한 결속력을 자랑해온 자민당이지만 ‘배지’ 앞에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정치의 기본속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파벌의 방침에 반해 ‘총리 퇴진’을 겨냥한 의원총회 소집 요구서에 서명하는 의원이 속출하는가 하면 현직 각료가 자신을 임명한 총리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하극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집행부는 공천권을 무기로 ‘강제진압’에 나서면서 대화와 타협이라는 일본정치의 미덕이 자취를 감췄다. 1955년 창당 이래 일본을 이끌어온 거대 정당이 정권과 배지라는 현실적 위기 앞에서 길을 잃었다. ○ ‘당 속의 당’ 파벌도 분열 속으로 자민당 정치는 한마디로 파벌정치다. 당보다 결속력이 강해 ‘당 속의 당’으로 불리는 파벌은 1955년 이후 자민당을 떠받쳐온 기둥이다. 총리 선출부터 정부 여당의 주요 인사, 핵심 정책결정은 모두 파벌 간 조율에 의해 결정된다. 파벌은 공천 인사 자금으로 소속의원을 관리해왔다. ‘파벌에서 찍히면 정치생명은 끝’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그러나 위기의 총선을 앞두고 파벌마저 분열상을 보이고 있다. 파벌 내에서도 지역기반에 따라 소속의원의 당선 가능성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역구가 튼튼하지 않은 의원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총리 간판으로는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해 파벌 영수의 뜻을 거스르면서 ‘반(反)아소’ 움직임에 동참하고 있다. 당내 1, 2위 파벌인 마치무라(町村)파와 쓰시마(津島)파의 파벌회장은 아소 총리를 지지하고 있지만, 상당수 소속의원이 의원총회 소집 요구서에 서명했다. 마치무라파는 89명 중 29명이, 쓰시마파는 68명 중 35명이 서명했다. 행동통일을 중시해온 파벌이지만 위기에 몰린 소속의원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전체 서명의원 133명 가운데 이번 총선을 치러야 하는 중의원의원 120명 중 지역기반이 약한 초·재선의원이 56명이나 되는 현실에서 ‘당과 파벌보다 배지’라는 점을 읽을 수 있다. ○ 총리에게 대드는 각료 아소 총리를 적극 옹호해온 요사노 가오루(與謝野馨) 재무상과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농림수산상은 15일 저녁 총리관저를 찾았다. 이들은 상황이 너무 어려우니 총리가 자진 사퇴하는 것이 낫겠다는 말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소 총리가 이를 거부하자 요사노 재무상은 기자들에게 “민주주의 정당이라면 의원총회를 열어야 한다”며 반발했다. 그는 최근 도쿄도의원 선거에서 자신의 지역구인 도쿄1구역의 베테랑 후보가 민주당의 26세 신진에게 패하는 것을 보고 낙선될 수도 있다고 느낀 나머지 하극상을 감행했다는 해석이 있다. 정당과 달리 일심동체인 내각에서 현직 각료마저 ‘반아소’에 동참한 것이다. 이들은 총리가 중의원 해산을 선언해도 법률상 필수절차인 각료서명을 거부할 것이란 말도 나온다. 총리 측은 “그러면 즉각 파면해버릴 것”이라며 격한 반응을 보였다.○ 주류는 ‘공천 협박’으로 강제진압 아소 총리 측은 서명의원 133명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철회하지 않으면 각오는 돼 있겠지”라며 공천을 주지 않겠다는 협박으로 맞섰다. 대화와 타협을 중시해온 의원내각제의 일본정치에서 현역 의원을 상대로 노골적 강제진압에 나선 것은 이례적 광경이다. 모리 전 총리의 지휘 아래 아소 체제를 지탱해왔던 마치무라파를 비롯한 주요 파벌의 간부들도 자파 소속 서명의원에게 서명 철회를 강요했다. 파벌 간부들은 자민당의 골격인 파벌정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독자행동 의원을 진압해야 한다는 점에서 당 집행부와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쓰시마파의 쓰시마 유지(津島雄二) 회장은 한 서명의원에게 “의원총회가 열리면 정권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정말 철회할 뜻이 없느냐”며 압박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일부 서명의원은 “내 뜻이 아니었다. 이용당하는 것 같다”며 서명철회 의사를 밝혔다. 당 집행부는 이를 근거로 “서명의원 수가 의원총회 소집 요건인 중·참의원 정원의 3분의 1(128명)에 못 미친다”며 의원총회 대신 의결권 없는 간담회를 21일 소집하겠다고 밝혔다. 아소 총리는 간담회 직후 중의원 해산을 선언할 예정이다. ○ 결국 ‘찻잔 속의 태풍’으로(?) 자민당 혼돈의 배경에는 소선거구 제도가 있다. 예전의 중선거구제와 달리 현행 소선거구제에서는 1등만 살아남기 때문에 의원의 낙선 위기감이 매우 크다. 이 때문에 의원들이 동요할 가능성이 높지만, 한편으론 탈당 등 극단적 선택을 하기는 힘들다. 무소속 당선 가능성이 극히 낮기 때문이다. 당 집행부가 공천권을 무기로 강제진압에 나설 수 있는 이유다. 도쿄=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