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광장을 가다]<3>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

  • 입력 2009년 7월 24일 03시 00분


바닥엔 탱크 지나간 기준선이…17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관광객과 시민들이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바닥의 직선은 5월 9일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에 실시된 군사 퍼레이드에서 탱크와 미사일 탑재 차량이 지나간 기준선이다. ‘러시아의 심장부’인 붉은광장은 외국 팝가수의 공연과 각종 행사가 열리는 등 갈수록 상업적인 색채가 짙어지고 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바닥엔 탱크 지나간 기준선이…
17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관광객과 시민들이 한가로이 산책을 즐기고 있다. 바닥의 직선은 5월 9일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에 실시된 군사 퍼레이드에서 탱크와 미사일 탑재 차량이 지나간 기준선이다. ‘러시아의 심장부’인 붉은광장은 외국 팝가수의 공연과 각종 행사가 열리는 등 갈수록 상업적인 색채가 짙어지고 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탱크행렬 긴장… 콘서트의 여유… 총천연색 문화의 붉은광장
중세엔 ‘아름다운 광장’
물품교역 많아 ‘큰 시장’
화재 자주 나 ‘불의 광장’
시대 따라 다양한 명칭

“긴장과 여유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관광 명소입니다.”

17일 오후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 서쪽 입구에서 관광 안내원이 외국인들 앞에서 이렇게 말하며 붉은광장에 대한 안내를 시작했다. 관광객들이 다갈색 돌멩이로 포장된 광장에 들어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돌았다. 안내원은 담장 위에서 돌아가는 감시카메라를 가리키며 “국가 보안상 망원렌즈를 낀 카메라로 대통령 집무실 부근인 크렘린 건물을 찍을 수 없다”는 설명을 했다. 이 말을 듣자 셔터를 누르는 관광객들의 손이 멈춰졌다.

“시선을 크렘린 맞은편 굼(GUM) 백화점 쪽으로 두면 좋다”는 관광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권력은 쳐다보지 말고 상품이나 구경하라’는 강요로 들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5분쯤 지나니 광장이 여유의 공간으로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아내의 생일을 맞아 산책을 나온 모스크바 주민 알렉산드르 포드마조 씨는 “감시카메라에 대한 긴장은 관광객의 과장된 생각”이라며 “지금의 시대상을 한번 둘러보라”고 말했다. 이날도 광장 동쪽 굼 백화점 앞에서는 콘서트를 위한 대형 구조물이 세워지고 있었다. 일주일 전에는 광장 남쪽 성 바실리 성당 앞에 이런 구조물이 설치됐었다. 주민들은 “록 음악 마니아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이 광장에서 록 페스티벌과 노래경연 대회가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붉은광장에 가설무대 하나가 설치되면 일주일 내내 방문객들의 통행이 부분적으로 제한된다. 그러나 시민들은 이런 제한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찍거나 산책을 즐겼다.

○ 아름다운 광장

모스크바 크렘린 북쪽 길이 330m, 너비 70m의 붉은광장(러시아어: 크라스나야 플로샤디)은 그 명칭 때문에 지금까지 색깔 논쟁의 소재가 되고 있다. 크렘린 벽의 붉은 벽돌, 사회주의 국가의 붉은 군대, 크렘린 종탑 위의 붉은 별 등이 광장의 명칭과 연관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색깔 논쟁은 광장의 유구한 역사와 무관하다는 게 문화재 전문가들의 얘기다. 전문가들은 러시아어의 의미 변화에서 광장 명칭의 유래를 찾고 있다. 현대 러시아어로 ‘붉다’는 뜻으로 통용되는 ‘크라스나야’는 중세시대에는 ‘아름답다’라는 의미로 주로 쓰였다. 러시아 문화재감독청이 펴낸 안내 책자에 따르면 크렘린 옆 공간이 ‘아름다운 광장’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620년대. 당시 왕과 고관대작들이 광장에서 크렘린으로 지나가던 통로는 지금은 ‘크렘린 시계’라 불리는 스파스카야 탑이었다. 이 탑 위 지붕이 텐트로 덮이고 지붕 꼭대기에 러시아를 상징하는 양두(兩頭) 독수리상이 금으로 도장된 뒤부터 사람들이 이 공간을 아름다운 광장으로 불렀다는 것.

그 이전에 이 광장은 물품 교역이 왕성했다고 해서 ‘큰 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광장 주변 목조 건물에 불이 자주 나 ‘불의 광장’이라는 오명도 갖고 있었다.

○ 다양한 의식이 혼재

붉은광장 바닥에는 지금도 직선 차선이 그어져 있다. 올 5월 9일 제2차 세계대전 승전기념일에 실시된 군사 퍼레이드에서 탱크와 미사일 탑재 차량이 지나간 기준선이다. 지난해 1월 블라디미르 푸틴 당시 대통령은 소련 붕괴 이후 처음으로 붉은광장 군사 퍼레이드를 부활시켰다.

굼 백화점 남쪽에서는 19세 말 제정러시아 때 들어섰던 도매상 건물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이 건물 북쪽에는 1612년 폴란드군을 물리친 기념으로 세워졌다가 스탈린 통치 시절 파괴된 카잔 성당이 최근 복구됐다. 권력과 자본, 교회가 서로 과거의 영광을 앞세우며 광장의 주인이라고 싸운다는 인상이 들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시민들은 이런 것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들은 아름다운 바실리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굼 백화점 1층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사먹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러시아 지방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온 주민들은 붉은광장을 여전히 신성한 장소로 여기고 있었다. 지방도시 예카테린부르크 시민 45명과 함께 시내 관광을 나왔다는 세르게이 시냐코프 씨는 “시대의 변천에도 이 광장은 ‘러시아의 심장부’라는 생각 때문에 대부분의 지방주민은 모스크바에 처음 오면 반드시 찾아온다”고 말했다.

2003년 매카트니 공연후
통제 공간에 상업성 봇물
작년 군사 퍼레이드 부활
19세기 건물복원 한창

○ 공간 활용의 변천

붉은광장은 갈수록 상업적인 색채를 진하게 내고 있다. 통제의 공간으로 통하던 붉은광장에 상업성의 봇물을 튼 계기 중의 하나로 폴 매카트니의 공연이 꼽힌다. 옛 소련 시절 공산당은 비틀스의 레코드 모두를 유통 금지 품목으로 지정했다. 비틀스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가 붉은광장 공연 무대에 선 때는 소련 붕괴 후 12년이 지난 2003년 5월. 그의 노래가 붉은광장에서 울려퍼진 뒤부터 러시아 공연기획사들은 유명한 외국 팝 가수나 노래를 붉은광장으로 끌어들이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소련 시절 공산당 간부들이 자주 이용하던 굼 백화점은 러시아에서 가장 비싼 명품 판매소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굼 백화점 앞 광장엔 2006년 겨울부터 일반 시민들이 이용하는 유료 스케이트장이 들어섰다.

광장 서쪽 중심부에 있는 레닌 묘지를 시민을 위한 공간으로 재활용해야 한다는 얘기도 끊임없이 나온다. 묘지 앞을 둘러보던 한 시민은 “영구 보존된 레닌의 시신은 축제가 열릴 때마다 시민들의 신경을 거스르게 하는 방해물”이라고 말했다.

광장을 향한 시민들의 발걸음이 잦아지면서 제정러시아 군주와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사용하던 연단도 과거의 유물이 됐다. 러시아 황제들이 칙령을 발표할 때 이용하던 둥근 연단은 지금은 광장 남쪽으로 밀려나 있다.

관광객들은 광장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차량 통행금지와 각종 통제 등 교통의 불편함이 해소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미국 관광객 캐서린 맥도널드 씨는 “교통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 붉은광장도 시민들에게 잊혀지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시민 축제의 장으로 공간 활용도 높일 것”▼
페트라코프 러 문화재감독청 부청장

“붉은광장은 시민이 다방면으로 향유하는 공간으로 바뀔 것이다.”

붉은광장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는 빅토르 페트라코프 러시아 문화재감독청 부청장(사진)은 광장 활용 계획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붉은광장은 역사적 변천을 거듭했다. 붉은광장의 문화적 가치는 무엇이고 무엇을 우선 보존할 계획인가.

“크렘린 역사박물관 바실리성당 백화점에 둘러싸인 붉은광장은 러시아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16세기 이후 현재까지 러시아와 소련의 심장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국사범에 대한 사형 집행 장소, 차르의 사격장, 소련 공산당 간부의 무덤 등 부정적 유산도 유지되고 있다. 모든 것이 후세대들이 교훈으로 새겨야 할 러시아 역사의 일부분이다. 원형을 유지하면서 주변 건물을 조금씩 보수해가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차량 통행이 금지되고 당국이 각종 통제를 자주해 불편을 호소하는 시민들도 많다. 접근 통로를 현대식으로 바꿀 계획은 없나.

“1909년 광장 동쪽에 백화점이 들어선 이후 광장에 전차가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탈린 통치 때인 1930년 전차의 레일을 없앴다. 광장에서 군사 퍼레이드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차량 통행을 금지하는 것은 붉은광장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기 때문이다. 자동차나 전차가 다니면 광장은 물론 주변 건물이 손상될 수 있다는 것이 유네스코의 의견이다. 우리는 시민들에게 광장에 올 때 지하철을 타고 오라고 권고한다.”

―광장 중앙의 레닌 무덤을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이 있는데….

“우리는 그런 정치적 논란을 피하고 싶다. 스탈린 통치 말기에는 아름다운 바실리 성당을 군사퍼레이드를 위해 옮겨야 한다는 말도 나왔다. 문화유산이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면 당대에 파괴됐다가 후손들에게 비난을 받는 경험을 숱하게 했다. 문화유산을 파괴하기 전 그 자리에 들어서는 새로운 문화재가 미래에 어떤 가치를 지닐지 잘 생각해야 한다.”

―광장 활용도를 높이기 위한 방안이 있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광장 공간을 더 많이 자유롭게 활용하는 일은 적극 도와줄 생각이다. 2000년 이후 콘서트, 각종 설치 예술, 시민 축제가 자주 열리는 것도 이런 방침 때문이다.”

―사회 정치적 단체가 광장을 독점적으로 이용하거나 집회를 열면 허용할 것인가.

“집회 허가는 우리 소관 사항이 아니지만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 특히 특정 단체에 의해 문화유산이 파괴되는 것은 사전에 적극 막을 계획이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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