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묻지 마 살인’이 급증하는 가운데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되는 쪽으로 정리되고 있다. 법무성은 최근 이 같은 내용의 최종 보고서를 만들었으며 법무상 자문기관인 법제심의회 논의를 거쳐 올가을 형사소송법 개정을 추진할 방침이다.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된다면 1880년 메이지(明治) 시대에 처음 도입된 시효제도가 100여 년 만에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이다.
일본에서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끔찍한 살인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피해 유족과 사회단체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돼 왔다. 지난해 6월 도쿄의 전자상가 밀집지역인 아키하바라(秋葉原)에선 25세 청년이 트럭을 몰고 인파 속으로 돌진한 뒤 무차별적으로 흉기를 휘둘러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하는 사건이 발생해 일본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달 초엔 40대 실직자가 오사카(大阪)의 빠찡꼬 가게에 가솔린을 끼얹고 불을 질러 4명이 숨지고 19명이 다쳤다. 범인들은 한결같이 “누구든 닥치는 대로 죽이고 싶었다”고 진술해 일본 사회를 경악하게 했다. 지난해 이후 일본에서 발생한 ‘묻지 마 살인’은 17건으로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93년 이후 가장 많다.
흉악범죄의 증가와 함께 일본에서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여러 차례 연장됐다. 1880년 시효제도 도입 당시 10년이었던 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908년 15년으로 늘었고, 거의 100년 만인 2005년 25년으로 연장됐다. 유전자(DNA) 감정 등 과학수사의 진전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도 유력한 증거를 새로 얻거나 유지하는 게 가능해진 점이 시효 연장의 배경이었다. 이번에는 불과 4년 만에 시효 연장이 아니라 아예 폐지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시효 폐지 움직임은 올 2월 살인 피해자 유족이 ‘천국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폐지 운동을 적극 벌이고 국민 여론이 이에 동조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이들은 “남의 목숨을 빼앗아 놓고 ‘단지’ 20여 년 숨어 있으면 무죄가 된다는 건 용납할 수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법무성도 살인죄의 공소시효 폐지 방침을 굳힌 근거에 대해 ‘생명침해사범은 다른 범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게 국민의 법 감정’이라고 말했다. 법무성 자체 조사에서도 70%가 공소시효 폐지에 찬성했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살인과 마찬가지로 법정 최고형이 사형이면서도 이번 시효 폐지 대상에서 제외된 중대 방화나 강절도범과의 형평성이 문제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수사를 무한정 계속해야 하는지와 증거를 장기간 보존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도 제기된다.
일본변호사협회는 이런 이유 등으로 시효 폐지에 반대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피고의 알리바이 입증과 증인의 기억 능력이 약해져 진실 규명이 쉽지 않다는 이유도 들었다. 변협은 공소시효를 폐지해 봐야 범인을 못 잡으면 유족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만큼 피해 유족에 대한 특별한 보상 제도를 마련하자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