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미국 워싱턴 의회를 나서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의 눈은 심하게 충혈돼 있었다. 평소 허스키한 목소리 역시 마른 논처럼 갈라져 나왔다. 그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제1과업’인 건강보험개혁법안의 하원 통과를 지휘하는 총사령탑. 절대 다수 의석을 확보하고도 민주당 내 반대파를 설득하지 못해 합의안을 도출하지 못하는 스트레스가 그대로 묻어났다.
29일에는 백악관의 람 이매뉴얼 대통령비서실장까지 나서 총력전을 펼친 끝에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펠로시 의장은 하원 민주당 원내대표인 스테니 호이어 의원과 같이 낸 성명에서 “하원 세입위원회 등 3개 관련 상임위원회는 8월 한 달의 휴회기간 중 포괄적인 단일 법안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합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당내 보수파의 반대 의견을 수렴해 저소득층 보험 가입을 위한 정부의 보조금 규모를 줄이는 한편 중소기업의 고용근로자에 대한 보험 제공 의무를 면제하는 내용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전은 진전이지만 9월이 돼야 비로소 하원에서 최종 법안을 만들기 위한 본격적 논의가 시작된다는 점에서 어정쩡한 합의라는 해석도 나온다. 당내 진보진영에서는 “개혁정신의 후퇴”라며 합의안 거부를 공언했다.
● 민주당 ‘푸른 개’ 오바마를 물다
펠로시 의장과 오바마 대통령을 괴롭힌 반대파는 이른바 ‘블루도그(Blue Dog) 데모크라트’. 재정의 건전성과 국가안보는 당파를 초월한 미국의 근본 목표가 돼야 한다며 1995년 결성됐다. 51명까지 세를 불렸다. 블루도그 그룹의 리더 격인 마이크 로스 의원은 펠로시 의장이 성명을 내놓은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제야 모든 의원이 9월 초까지 대통령이 제안한 건강보험 개혁법안을 상세히 읽고난 뒤 지역구민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됐다”며 “우리가 대통령에게 양보받은 것은 시간”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번 합의에 따라 10년간 1000억 달러의 비용을 줄일 수 있게 됐다”고도 했다. 워싱턴포스트는 “블루도그 그룹이 건강보험 개혁과 관련한 토론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평가했다.
건강보험 개혁의 중요성을 설득하기 위해 대중 속으로 뛰어든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노스캐롤라이나와 버지니아 주 연설에서 불편한 마음을 표출했다. 그는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신물이 난다”며 “국민들을 겁주려는 시도를 그만둬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50% 아래로 떨어진 오바마 지지율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갈수록 하락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라스무센이 29일 18세 이상 ‘투표를 할 것으로 예상되는 유권자’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업무지지도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지가 49%, 반대가 50%로 조사됐다. 임기 초반 65%의 지지율을 시작으로 5월까지도 58% 이상의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오바마 대통령으로서는 충격적인 결과다. 갤럽이 25∼27일 18세 이상 성인 362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54%로 나타나 대통령 취임 후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했다.
미국 언론은 건강보험, 교육, 기후변화 정책 등의 빠른 개혁 속도에 불안감을 느낀 중도파의 이탈을 주요 원인으로 꼽았다. 실례로 건강보험을 개혁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여전히 대다수가 찬성했지만 개혁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게 커지고 있다. 뉴욕타임스와 CBS가 성인 1050명을 상대로 실시한 전화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9%가 오바마 대통령의 건강보험개혁이 의료 서비스의 질을 저하시키고 조세 부담을 늘리는 한편 의료 서비스 선택 폭을 제한할 우려가 있다고 응답해 이를 뒷받침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