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원주민 권리선언’ 2주년… 지구촌 명암교차

  • 입력 2009년 8월 5일 02시 56분


볼리비아 원주민 자치 ‘햇살’

美 인디언은 범죄 나락으로

“난 기필코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수백만의 함성으로 변할 것입니다.”(18세기 볼리비아 원주민 지도자인 투팍 카타리가 사형을 앞두고)

영국 시사월간지 뉴인터내셔널리스트 최신호는 “올해가 세계 원주민들에게 ‘새로운 여명(new dawn)’의 갈림길에 들어선 시기”라고 보도했다. 2007년 9월 ‘유엔 원주민권리선언’이 공식 채택된 지 2주년을 맞아 세계 곳곳에서 원주민들의 삶에 눈에 띄는 변화가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그 갈림길에서 나라별로 명암이 뚜렷하다. 남미대륙 사상 처음으로 원주민 자치권을 눈앞에 둔 볼리비아를 비롯해 호주 캐나다 등에선 새벽의 햇살이 또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원주민에 대한 보이지 않는 불평등이 남아 있는 미국이나 고향을 잃고 난민으로 헤매는 콩고민주공화국, 팔레스타인의 원주민에겐 어둠의 장벽이 여전하다.



○ 볼리비아 호주 캐나다 ‘맑음’

영국 BBC방송 등은 2일 볼리비아가 ‘역사적인 한 발’을 내디뎠다고 전했다. 이날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이 동부 산타크루스 주 카미리 시에서 “12월 원주민 자치권 인정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선포한 것을 빗댄 말이다. 아울러 사상 최초로 원주민 출신 의원 14명도 함께 선출한다. 볼리비아는 원주민인 케추아족(30%)과 아이마라족(25%)이 인구의 절반을 넘는다. 하지만 오랫동안 백인(15%)과 그들을 지지하는 백인 원주민 혼혈 ‘메스티소’가 지배했다.

그러나 2005년 아이마라족 출신인 모랄레스 대통령이 취임하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특히 이번 발표 장소가 산타크루스 주라는 점은 상징적이라고 AFP통신은 보도했다. 이곳은 백인을 대변하는 야당의 주요 근거지였기 때문이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올 초 국민투표 안이 야당이 다수인 상원에서 가로막히자 단식농성을 벌여 통과시켰다.

호주와 캐나다도 원주민 삶에 청신호가 켜졌다. 3일 호주 ABC방송 에 따르면 호주 정부는 4월 유엔 원주민권리선언을 지지한 데 이어 8월부터 원주민 주택정책에 따라 공짜로 집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호주는 지난해 케빈 러드 총리가 정부 최초로 원주민에게 공식 사과하면서 원주민 정책이 급물살을 탔다. 캐나다 역시 스티븐 하퍼 총리가 속한 보수당이 원주민 지원 정책에 소극적이던 그동안의 태도에서 벗어나 원주민 유화책을 적극 추진 하고 있다고 캐나다 지역신문인 밴쿠버 선이 1일 보도했다.

○ 미국 콩고민주공화국 팔레스타인 ‘흐림’

미 워싱턴 지역신문 이그재미너는 지난달 28일 “미국에서 원주민(American Indian)은 ‘망가진 패배자(broken and defeated people)’와 동의어로 쓰인다”고 보도했다. 소수민족정책에 적극적인 미국이지만 토착 원주민에 한해선 실패의 기운이 짙다는 것이다. 특히 교육과 취업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범죄에 빠져드는 원주민 수가 늘고 있다. 2001년부터 매년 원주민 범죄 증가율은 4.6%로 가파르게 늘고 있다. 게다가 9.4%의 교도소 수감률은 미 평균(7.6%)보다 훨씬 높아 ‘보이지 않는’ 불평등의 증거라는 지적이 나온다. 10대와 20대 원주민의 범죄율이 백인의 2∼3배에 이르러 이들의 암울한 미래가 엿보인다.

콩고민주공화국 원주민은 더 심각한 ‘생존’의 문제와 맞닥뜨려 있다. 오랜 내전에 시달려 온 콩고는 △르완다 후투족 과격파의 유입 △군소 파벌 민병대의 자원 쟁탈 △총체적 국력 약화 등 3가지 악재가 겹치며 올해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최근 두 달 사이에 콩고 동부지역에서만 40만 명의 원주민이 고향을 잃었다. 워싱턴포스트는 2일 “원주민들을 위한 최소한의 생필품도 지원되지 않고 병원엔 죽음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가득하다”고 전했다.

팔레스타인 원주민의 삶도 피폐하긴 마찬가지다. 최근 레바논의 팔레스타인 원주민 거주지를 현장 취재한 뉴인터내셔널리스트에 따르면 50만 명에 이르는 원주민은 레바논 시민권은커녕 난민 지위도 인정받지 못해 고용계약을 못하고 재산권도 행사할 수 없다. 최근엔 식수 공급마저 끊겼지만 하소연할 곳도 딱히 없다고 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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