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경제를 제2의 대공황에서 구해낸 구원자인가, 금융위기를 예측하지 못한 무능한 감독자인가.’
내년 1월 31일로 4년 임기를 마치는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사진)의 연임을 놓고 벌써부터 미국에서 찬반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그가 탁월한 위기대처 능력으로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를 위기에서 구해냈다고 주장하지만 한편에서는 금융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을 파악하지 못해 위기를 키웠다고 반박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로 경제정책에 대한 여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버냉키 의장을 연임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0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크루그먼 교수는 말레이시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성공적으로 금융위기에 맞서 싸웠다는 점만으로도 연임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버냉키 의장이 사상 처음으로 제로금리 수준으로 금리를 낮추고 시장에서 직접 국채를 사들이며 유동성을 공급하는 ‘양적완화 정책’을 사용해 결국 시장에서 돈이 돌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또 다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컬럼비아대 교수는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스티글리츠 교수는 5일 블룸버그TV와의 인터뷰에서 버냉키 의장의 연임 여부에 대해 “상업용 부동산 부실과 주택 압류 문제, 은행 부실 등 위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교체 여부를) 고려해 봐야 하는 문제”라고 말했다.
지난달 26일엔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와 안나 제이콥슨 슈워츠 전미경제조사국 연구원이 뉴욕타임스에 각각 찬반 기고문을 실어 버냉키 의장 연임에 대한 지상 논쟁을 벌였다. 루비니 교수는 “1930년대 대공황이 준 교훈은 경기부양 조치의 결여와 자금 공급 시스템의 붕괴가 경제를 악화시켰다는 것이다”며 “버냉키가 취한 저금리 기조 유지 정책과 금융기관에 대한 대출 장려 조치는 미국이 장기침체를 피할 수 있도록 했다”고 극찬했다. 반면 슈워츠 연구원은 “버냉키의 금융정책이 경제위기를 심화시켰으며 ‘무계획자’인 그는 연임할 자격이 없다”고 반박했다.
논란을 의식한 듯 버냉키 의장은 최근 미국 중앙은행 총재로는 이례적으로 언론에 적극 대응하고 있다. 그는 최근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문을 싣는가 하면 지난달 미주리 주 캔자스시티에서 가진 타운홀 형식의 주민과의 만남에서 “월가의 대형 금융기관들을 망하게 놔뒀다면 금융시스템이 붕괴되고 경제가 망가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논란 속에서 임명권자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직 의중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버냉키 의장의 업무성과에 대해 “잘하고 있다”는 의례적인 언급을 하고 있을 뿐 연임 관련 질문에는 “노 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로이터통신은 6일 버냉키 의장의 연임은 쉽지 않은 결정이라며 오바마 대통령이 10월 말까지 결정을 미룰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문가들은 올해 안에 실업률이 둔화돼 미국인들의 고통이 줄어들고 미국 경제가 회복의 길로 접어들지가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을 좌우할 것으로 보고 있다.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