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창원]한일 역사장벽에 ‘소통의 창’을

  • 입력 2009년 8월 24일 02시 50분


매년 8월 15일이면 일본은 시계를 거꾸로 되돌린 듯한 거대한 착각에 빠져든다. TV와 신문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의 원폭 투하로 숨져간 불쌍한 죽음을 추도하며 일제히 슬픔에 잠긴다. 당시의 쓰라린 고통과 공포의 기억을 떠올리며 반인륜적 핵무기를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는 결의도 빠뜨리지 않는다. 전적으로 동감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일본 언론들의 보도에는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 세계 유일의 피폭국인 일본은 피해자일 뿐 가해자로서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원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던 ‘원죄’에 대해 입을 꾹 다문다.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해 무자비하게 숨진 한국인의 죽음과 일제의 무모한 침략전쟁 속에 아시아 각국이 당한 피해에 대한 추도와 반성은 오간 데 없다. 올해 종전기념일(일본에서는 8월 15일을 이렇게 부른다)에도 어김없이 도쿄(東京) 야스쿠니(靖國) 신사는 일장기로 온몸을 휘감은 우익들로 넘쳐났다. 일제 침략전쟁은 시대적 상황에 따른 ‘불가피한 투쟁’으로 재해석되고 미화됐다.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는 역사왜곡 교과서를 채택하는 지방자치단체도 하나둘씩 늘어가고 있다. 이달 초에는 도쿄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요코하마(橫濱) 시 교육위원회가 일본 대도시로는 처음으로 역사왜곡 교과서를 중학교 교재로 사용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자타가 공인하는 경제선진국 일본의 역사인식 수준은 뒷걸음질하는 것일까.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일본인 친구에게 의견을 물었다. 평소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지만 ‘과거사’에 관한 대화는 처음이었다. “일본 사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본 사회의 우경화는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과거사를 반성하고 사죄하는 일본인이 많지만 단지 조용히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을 뿐이라는 대답이었다.

지난 주말 취재차 다녀온 ‘한일 미래구축포럼’은 두 나라의 미래를 짐작해볼 기회였다. 젊은 세대가 평화와 공생의 가교를 놓자는 취지로 만든 자리로 한국의 고려대와 조선대, 일본 와세다대 학생 40여 명이 참석했다. 역사인식 문제를 둘러싸고 팽팽히 이어지던 토론은 의외의 곳에서 접점을 찾았다.

한 일본 여학생은 자신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 2001년 도쿄 지하철역에서 일본인 취객을 구하려다 숨진 이수현 씨를 들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지만 한국인의 이타정신이 충격이었어요. 일본인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이 씨가 다니던 일본어 학원에 직접 찾아가 한국주소를 알아냈고 부모님께 편지를 썼다. 우정의 편지는 8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우정은 자연스럽게 한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고 한일 과거사로 확장되면서 한일 관계개선에 책임감을 갖게 됐다고 했다.

“한국 문화를 접할 때마다 닮은 점이 많아 형제나라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역사문제만 나오면 난감하다”는 학생도 있었다. 할아버지 세대의 일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주 만나 거리감을 좁히고 싶다는 게 일본 학생의 바람이었다.

한일 간에는 쉽사리 극복되지 않는 높은 벽이 있다. 광복 60여 년이 지났지만 관계 개선을 위한 양국의 정치 외교적 접근은 번번이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 벽은 꼭 단숨에 뛰어넘어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작은 문을 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당장 벽을 허물 수 없다면 더디더라도 시민 문화 차원의 접촉면을 넓혀가는 것도 중요하다. 일본의 우경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소통의 창(窓)이 필요할 것 같다.

김창원 도쿄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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