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뉴스의 글렌 백(오후 5시 토크쇼 진행자)이 나오면 TV를 끄세요."
지난주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열린 한 건강보험 개혁 토론회에서 이 지역 출신 밥 잉그리스 연방하원의원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비록 공화당 소속이지만 잉그리스 의원은 "건보개혁이 이뤄지면 플루백신이 배급제로 할당될 것"이라는 등의 루머에 현혹되지 말고 이성(理性)을 되찾자고 호소하던 참이었다. 그런 차원에서 일부 강경보수 성향 방송 진행자들의 과장된 주장을 비판하며 폭스뉴스를 예로 들었다. 그러자 성난 청중들은 "입 닥쳐"라고 외쳤다. AP통신의 현장 스케치에 따르면 건보개혁 토론장의 성난 반대자들에게 글렌 백은 영웅이었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이 최근 "케이블 뉴스가 건보개혁을 궤도에서 이탈시키려 한다"고 푸념했을때도 폭스뉴스를 지칭한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미국의 보수성향 케이블 방송인 폭스뉴스가 버락 오바마 시대를 맞아 오히려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추진중인 방대하고 야심찬 개혁 어젠다를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의 구심점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폭스뉴스 시청자는 1년간 11% 가량 증가했다. 올 2분기 시청자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33%나 늘었다. 지난해말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되자 "앞으로 중도성향의 CNN과 리버럴 성향의 MSNBC가 영향력을 넓힐 것"이란 관측이 많았으나 실제론 폭스뉴스와 다른 케이블 뉴스 채널간의 시청률 차이는 더 벌어지고 있다. 누적시청자(cumulative audience·1개월 또는 6개월 등 일정한 기간 동안 한번 이상 본 사람의 총수) 기준으로는 여전히 CNN이 선두지만 일반적인 시청률 집계에선 폭스뉴스가 압도적 1위다.
특히 공화당 지지자 사이에서 폭스뉴스에 대한 '충성도'는 CNN과 MSNBC에 비해 3배 이상 높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CNN과 MSNBC에 대해 보이는 '충성도'에 비해 '농도'가 훨씬 짙은 것이다. 또한 민주당 지지자 가운데 폭스뉴스를 보는 사람이 공화당 지지자 가운데 CNN이나 MSNBC를 보는 사람 보다 조금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폭스뉴스는 올봄에 다른 주류 언론들은 사실상 무시했던 이른바 '티 파티'(Tea Party·미국 독립전쟁 시절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티파티를 원용해 열린 오바마 정부의 세금 및 재정 정책에 반대하는 일련의 집회들)를 집중 보도하면서 핵심 보수층의 대변자 역할을 자임했다. 이어 건보개혁 논란이 불거지자 반대파를 대변하는 보도와 논평을 대폭 확대했다. 글렌벡은 "폭스가 오바마 반대파를 추종하는게 아니다. 폭스가 반대파를 이끈다"고 주장했다.
언론전문가들은 "오바마 정부 비판 집회를 보도할 때 다른 언론들은 누가 집회를 조직했는지 등에 중점을 둔다. 반면 폭스뉴스는 참가자들의 의견과 관심사항을 대변해주는데 초점을 둔다"고 분석한다. 폭스뉴스가 강성 우파를 대변하지만, 최근 일부 진보성향 언론들까지 다뤘던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 장소가 하와이가 아니다"는 등의 극단적 주장은 무시해버리는 자세도 평가된다.
물론 인기도와 신뢰도는 다르다. 폭스뉴스는 '우리는 보도만 할뿐 결정은 당신이 한다'(We Report, You Decide), '공정하고 균형잡힌'(Fair and Balanced)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고 있다. 하지만 한 조사결과 폭스뉴스가 '믿을 만하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이 41%로 '믿을 수 있다'는 응답자(34%)를 압도했다. 18~29세 시청자 그룹에선 82%가 폭스뉴스를 안 본다고 대답했다. 흑인 가운데는 5%, 히스패닉 가운데는 11%만이 믿을 수 있다고 대답하는 등 소수인종 사이에선 특히 불신이 높다.
글렌 백은 하버드대 흑인교수 체포사건때 오바마 대통령을 '인종주의자'라고 표현하는 등 독설을 서슴치 않고 있다. 이에 항의해 월마트 등 대형 광고주들이 광고 집행을 중단했다.
워싱턴=이기홍특파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