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미국 일리노이 주 시카고로 취업이민을 떠난 이영백(가명·40) 씨. 지난해 초 영주권을 따내자 한국에서 가져온 종잣돈에 대출을 끌어 모아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같은 해 6월 한인 교포를 주 고객으로 하는 한국 기업의 건강식품 판매점과 빵집을 냈다. “미국에서 사귄 한인 교포 지인들의 추천도 있고, 미국에서 3년간 쌓은 영업 노하우를 활용하면 잘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경제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1년 만인 올해 6월 가게 문을 닫았다. 게다가 판매대리점 운영권을 인수받는 과정에서 생긴 분쟁으로 소송에 휘말렸다. 변호사 비용을 대느라 지난달에는 자가용까지 팔아치웠고 조만간 파산신청을 해야 할 상황에까지 내몰렸다. 그는 “시장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게 패착이었다”며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돈도 없고, 면목도 없다”며 뒤늦은 후회를 했다.》
○ 경기 침체에 허덕이는 한인타운
미주 한인 교포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 7월 초 찾은 이곳에서는 ‘분양 중’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건물이 여럿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아파트도 있고 사무용 빌딩도 있다. 미주 한인 교포뿐만 아니라 부동산투자자유화 조치 이후 늘었던 한국인들을 주요 고객으로 보고 분양을 시작한 건물들이다.
하지만 지난해 하반기 이후 거래는 거의 끊겼고, 현재는 대부분 비어 있다. 2006년 국내 한 건설업체가 주상복합건물을 짓겠다며 사들였던 로스앤젤레스 시내 중심가 땅은 덩그러니 빈 채로 남아 있다. 토지 매입 과정에서 중개했던 현지 기업과 한국 기업이 소유 지분을 놓고 논란을 벌이면서 공사가 지연됐고, 경기 침체가 시작되자 사업이 중단됐다.
주머니가 가벼워진 손님들을 끌기 위한 음식점들의 고객 유치 경쟁이 달아오르면서 ‘10달러만 내면 고기를 무한정 드립니다’라는 광고 문구를 내건 곳도 있다. 여행업계는 미국 경기 침체로 교포들의 여행 수요가 준 데다 달러당 원화 환율 급등과 신종 인플루엔자A(H1N1) 감염 우려로 한국 관광객들이 미국 여행 계획을 대거 취소하면서 ‘삼중고’를 겪고 있다.
중소기업체만 이 같은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니다. 캘리포니아 한인 교포를 주요 고객으로 영업을 해왔던 미래은행은 6월 26일 문을 닫았다. 이 은행은 5월 말 기준으로 자산 4억5600만 달러, 예금 수신액 3억6200만 달러에 이르는 중급 규모를 자랑했지만 경기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경기침체로 부실대출이 급증한 게 주 원인이었다.
○ 부동산 압류도 현지 평균 웃돌아
한인들이 겪는 고통이 주류 사회보다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결과도 나왔다.
시카고에 있는 드폴대 이진만 교수가 올해 4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8∼2008년 11년간 시카고와 주변 지역을 포함하는 일리노이 주 쿡 카운티에서 한인으로 추정되는 김씨 성(姓)을 가진 사람들의 압류주택은 996채였다. 2005년까지 두 자릿수에 머물던 압류주택은 2006년 120채가 된 뒤 2007년에는 241채로 배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쿡 카운티 전체 압류주택에서 한인 주택이 차지하는 비중은 0.1∼0.4% 수준에서 지난해 0.9% 수준으로 증가했다.
올해 5월 서던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한인 보유 주택 압류는 968건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이는 1년 전 660건보다 32% 증가한 수치다.
부동산 사기를 당하는 일도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 발렌시아 지역에 사는 한 한인 교포는 올해 3월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집을 판다는 광고를 냈다가 곤욕을 치렀다. 광고 후 며칠 뒤 단정한 모습의 흑인 가족이 찾아와 ‘3개월간 거주해보고 집을 계약하겠다’며 월세 명목으로 1만 달러짜리 수표까지 건넸다. 하지만 이들에게 받아 은행에 입금한 수표는 부도수표였고 이들은 3개월 넘게 집에 머물면서 관리비도 내지 않았다. 결국 이들을 강제 퇴거시키기 위해 집 주인은 소송까지 벌여야 했다.
○ 현지화 노력 부족한 것도 한 몫
한인 교포들이 경기 침체에 상대적으로 많은 고통을 겪는 것은 부동산 투자 비중이 다른 인종에 비해 높은 데다 투자 대상도 고가 부동산에 집중되는 성향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교수에 따르면 2000년 인구센서스 기준으로 일리노이 주의 한인 교포는 전체 인구의 0.6%에 불과했지만 그해 연간 부동산 구입자 가운데 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를 넘었을 정도로 부동산에 대한 투자 비중이 높다.
집값 대비 소득을 비교한 결과(2005년 기준)에서도 한국인은 14.29%로 미국 전체(28.92%)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이 교수는 “2005년과 2006년에 시카고 등 인기주거지역의 고가 아파트를 한인들이 집중 매입한 것으로 분석됐다”며 “이들은 대부분 투자를 목적으로 주택을 구입했다가 가격이 폭락하자 이자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압류당했다”고 설명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20년째 유통업과 부동산임대업을 하고 있는 오장훈 씨(49)는 “미주 한인 교포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온 관광객과 유학생을 겨냥한 여행업 음식점 등과 같은 업종이나 세탁소, 네일숍 등 경기 동향에 민감한 소규모 자영업에 집중해 있다”며 “경기침체에 원-달러 고환율이 겹치자 직격탄을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보험사 ‘윌리스’의 김용문 이사(43)는 “미국 이민 1세대나 1.5세대는 열심히 노력해 부를 쌓지만 부족한 언어능력으로 미국 현지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는 소홀하다”며 “이 때문에 경제 위기가 닥치면 대처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고 고통도 심해진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지난 1년간 성곡언론문화재단의 후원으로 미국 미주리주립대에서 연수한 경제부 황재성 차장의 보고서입니다.
▼美 주택시장 바닥 신호… 상업용은 “추락중”▼
주택시장에서는 그동안의 극심한 침체에서 탈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들이 잇따르고 있다. 미국 부동산중개인협회(NAR)에 따르면 지난달 기존주택 거래실적은 524만 채로 전달보다 7.2% 증가했다. 물량은 2007년 8월 이후 최대치이며, 증가폭은 1999년 기록 집계가 시작된 이후 가장 크다. 4개월 연속 증가한 것도 2004년 이후 처음이다.
종전에는 기존 주택 거래물량 가운데 절반 정도를 경매 처분되는 압류주택이 차지했으나 7월에는 이 비중이 4분의 1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긍정적이다. 압류된 주택을 싼값에 매입하는 거래보다 정상적인 주택거래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주택 신축 실적도 6월 58만2000채로 전월보다 3.4% 증가했다. 특히 아파트와 연립주택을 제외한 단독주택은 14.4%나 늘었다. 경기선행 지표인 주택건설 허가실적도 56만3000채로 8.7% 늘어 작년 12월 이후 가장 큰 폭의 증가율을 보였다.
반면 상업용 부동산 가치는 계속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블룸버그통신은 최근 무디스가 작성하는 상업용부동산가격지수를 인용해 올해 6월 미국 상업용 부동산 가격이 전월 대비 1%, 전년 대비 27%나 하락했다고 보도했다. 높은 실업률과 상품생산 감소, 소비 침체 등으로 상업용 부동산 수요가 계속 줄어들면서 임대료가 떨어지고 이것이 부동산 가치 하락으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이에 따라 상업용 부동산 대출자의 연체율은 올해 말에 역대 최고 수준인 7%를 넘어설 것으로 예측됐다.
시카고·뉴욕·LA=황재성 차장 jsonh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