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잘 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Everything is gonna be OK. Don't Worry.)”
미국 뉴욕 주 롱아일랜드에 사는 존 데소토 씨(55)는 며칠 전 인터넷 구직사이트인 ‘몬스터닷컴’을 검색하다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막내아들인 새뮤얼(12)이 서 있었다. 순간 감춰야 하는 사실을 들킨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마냥 어린아이인 줄 알았던 아들이 오히려 자신을 위로하는 의젓함에 뜨거운 무언가가 마음 한쪽에서 솟구쳐 올랐다.
데소토 씨는 말없이 새뮤얼을 꼭 안았다. 그는 올 7월 세인트존스대의 학내 건축책임자 자리에서 해고됐다. 그의 어머니 오드리 데소토 씨는 “너 같은 엘리트를 내몰다니, 정신 나간 사람들 아니냐”며 아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후로는 집에서만 지내는 상황이 불편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아졌어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 그러니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까요. 외식도 못하고 영화관에도 못 가고 있지만 마음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풍요롭습니다.”
경제위기가 본격화된 이후 해외 미디어는 가족의 해체나 위기를 강조하는 뉴스를 쏟아내 왔다. 하지만 취재팀이 확인한 사실은 구성원 간의 긴장감이 커진 가족도 있지만 경제위기 이후 가족의 가치를 재발견한 평범한 가족들이 훨씬 더 많다는 점이다. 삶이 팍팍해질수록 가족에게서 위안을 찾고 가족에게 더 많은 정성을 쏟는 모습은 선진국과 신흥국,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세계 모든 지역에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 경제위기의 선물 ‘가족의 가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가족 간의 유대감이 깊어지는 것은 한국이 이미 10여 년 전 외환위기 직후 경험한 사회현상이다. 당시 신문과 TV 광고의 주된 테마는 ‘가족의 사랑’이었고, ‘아빠 힘내세요∼’와 같이 가장(家長)을 격려하는 노래가 유행했다. 최근 글로벌 경제위기로 실직자가 쏟아지는 미국 영국 등 선진국 경제권에서도 ‘가족’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 뉴욕의 조지 블랙 씨(30)는 지난해 9월 15일 자신의 회사가 파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굴지의 투자은행(IB)인 리먼브러더스에 몸담은 지 6년 7개월 만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리먼을 인수한 바클레이스는 퇴직금 10만 달러를 받고 나갈 것인지, 아니면 익숙한 기존 업무 대신 한직으로 옮길 것인지 선택을 요구했다. 월가에서 몇 년째 피를 말리는 듯한 직장생활을 해 온 블랙 씨는 남들처럼 퇴직금을 받고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버스운전사로 일하는 호비뉴 파리아스 씨(37)는 매달 부모에게 송금하던 생활비를 보내지 못한 게 1년이 다 돼 간다. 한 달에 1500헤알(100만 원)을 버는 파리아스 씨는 월 생활비 지출을 40% 가까이 줄였고, 출근도 걸어서 한다. 하지만 한 달에 300헤알씩 붓는 적금은 계속 유지하고 있다. 열 살짜리 아들의 교육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파리아스 씨는 기회 있을 때마다 아들에게 법대에 가서 판사가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경제위기가 닥치니 배운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부모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아들은 꼭 대학에 보내고 싶은 만큼 적금은 절대 줄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직장 동료 등 사회적 관계에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가족에게만 집중하는 ‘코쿠닝(Cocooning·누에고치)족’이 생겨나기도 한다. 영국 런던에서 연금회사를 다니는 데이비드 벨 씨(40)는 요즘 ‘칼퇴근’한다. 동료들과 식사하거나 따로 만나 어울리는 일은 일절 없다. 퇴근 후 곧장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세 아이들과 놀아준다. 실직한 후 6개월 만에 구한 직장이지만 상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 과거의 그는 달랐다. 퇴근 후 식사를 마치면 곧바로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일했다. 벨 씨는 “회사에서 그렇게 노력했지만 돌아온 것은 해고였다”며 “더 이상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다. 내게 중요한 건 가족 뿐”이라고 말했다.
○ 더 넓어진 가족의 울타리
결혼하거나 독립했더라도 경제위기를 계기로 부모나 형제와 더 가까워진 가족도 많다. 따로 사는 비용을 감당하기 힘든 탓에 성인이 된 자녀들이 부모 집으로 들어가 3대가 함께 거주하는 대가족이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브라질 상파울루에 있는 오로라 카타리아 알바네제 씨(83)의 집은 딸과 외손자, 외손녀들로 북적인다. 공무원으로 일하다 최근 퇴직한 둘째 딸이 형편이 어려워지자 자녀들과 함께 알바네제 씨의 집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알바네제 씨는 “둘째 딸의 사정이 어려워진 것은 가슴 아프지만 휑했던 집에 사람 냄새가 나고 생기가 돈다”며 활짝 웃었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교정전문 치과 간호사로 일하는 팔로마 로렌테 페냐 씨(36·여)는 요즘처럼 어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거의 매일 퇴근할 때 친정에 들러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페냐 씨는 “외식비를 아끼기 위한 측면도 있지만 엄마에게 고민을 말하고 때론 어리광도 부리면서 마음이 여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미국의 실버사이트인 그랜드페어런츠닷컴에 따르면 미국 전체 가구의 5.3%인 620만 가구가 대가족으로, 2000년(500만 가구)에 비해 크게 늘었다. 그랜드페어런츠닷컴은 이는 경기침체 때문에 생겨난 현상으로, 성인이 된 자녀가 부모 집에 들어가 사는 경우가 전체 대가족의 62%라고 밝혔다.
부부관계도 더 가까워지고 애틋해진다. 요즘 아이슬란드에서는 ‘크레파 베이비’의 울음소리가 우렁차다. ‘붕괴’라는 뜻의 크레파(Kreppa)는 이 나라에서 경제위기라는 의미로도 통한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출산율도 올라가 ‘크레파 베이비’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것이다. 현지에서는 경제위기 이후 3배로 치솟은 실업률(9%)이 출산율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 살얼음 위를 걷는 가족들
경제위기로 가정 자체가 흔들리는 경우가 없지는 않다. 금전적인 문제로 스트레스가 커지면서 가족간에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폴란드 바르샤바에 사는 엘지비에타 파스테르나크 씨(40·여)는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원래 성격이 예민한 터에 수입이 줄어들면서 짜증이 더 늘어 혼자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려고 해도 작은 일에도 아이들에게 소리를 지르게 된다. 돈이 없으면 모든 게 다 문제가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브라질 상파울루 시 상파울루대성당 옆 골목에서 금은방 간판을 망토처럼 쓰고 전단을 나눠주는 일을 하는 조세 마누엘 씨(46)는 날마다 스페인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건다. 브라질에서 사업을 하다 2년 전 파산한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경제위기로 스페인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여의치 않아 불법 체류자로 지내고 있다.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부인은 이제 마누엘 씨의 전화를 피하는 상황이 됐다. 마누엘 씨는 “일자리만 구할 수 있다면 스페인으로 당장 돌아가 아내와 함께 살고 싶다”고 한숨을 쉬었다.
특별취재팀
제가 장난감을 너무 많이
아냐, 한번쯤 겪는 일이란다
美TV 세서미스트리트 ‘함께 이겨내기’ 다뤄
“어제 엄마가 직장에서 일자리를 잃었단다. 이제 당분간 회사에 못 나갈 거야.”(엘모의 엄마)
“(고개를 숙이며) 혹시 제가 장난감을 너무 많이 사달라고 해서 그런 건가요?”(엘모)
“오, 아냐. 그건 절대 네 잘못이 아니란다.”(엄마)
“그래,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 이런 일은 보통 가정에서 한 번쯤은 겪는 일이지.”(엘모의 아빠)
“(엄마 품에 안기며) 엄마, 정말 우린 괜찮은 거겠죠?”(엘모)
“그럼 당연하지. 걱정하지 마라.”(엄마)
9일(현지 시간) 방송될 미국의 유아용 TV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의 한 장면이다. 엘모는 이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빨간색 털보 인형. 경기침체로 직장에서 해고된 엄마가 그 사실을 아들에게 조심스럽지만 자상하게 설명한다. ‘가족이 함께 이겨내자(Families Stand Together)’는 제목이 붙은 이 프로그램에선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의 실직이나 가정경제의 어려움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또 가족이 함께 어떻게 불황을 극복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전문가들의 조언과 함께 방송된다. 유아에게 부모의 실직을 설명해야 할 만큼 불황은 세계 중산층 가정의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네덜란드 유통회사의 임원으로 있는 마르셀 다이크후른 씨(45)는 최근 일곱 살배기 아들 로빈에게서 당황스러운 질문을 받았다. “아빠, 근데 경기침체가 뭐예요?”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냐는 질문에 로빈은 “유치원의 한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들었다”고 했다. 그 친구의 아버지가 최근 경기침체로 직장을 잃었다는 사실을 다이크후른 씨는 알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에둘러 설명하다 결국 아이 등만 토닥여주고 말았다. 그 일이 있은 후 다이크후른 씨는 아내 쉴라(34)와 이 문제를 상의했다. 어린 자녀들에게 이웃들의 힘들어진 살림살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무작정 숨긴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실직은 자신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며칠 뒤 로빈을 다시 불러 친구에게 어떤 일이 생겼는지 처음부터 자세하게 설명해줬다”며 “비록 무겁고 피해가고 싶은 주제지만 부모들이 아이들과 눈높이를 맞춰 이에 대해 대화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사달라고 해서 그런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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