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아이 물들이려고?” 텍사스 학부모, 오바마 학교연설 반대

  • 입력 2009년 9월 4일 14시 48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교육'은 미국을 미국답게 만드는 밑바탕이자 최고 수단이다. '위대한 미국'을 지탱하는 A에서 Z다. 편모슬하에서 자란 흑인인 자신이 대통령이 된건 다 교육 덕분이었으며, 흑인 가정의 빈곤의 악순환도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게 그의 믿음이다. 그런 가치관에 바탕해 공교육 개혁을 거듭 강조해온 그는 8일 워싱턴 근교의 고교에서 연설을 통해 학생들에게 그런 생각을 직접 전달할 예정이다.

그러나 인생 선배의 입장에서 "공부 열심히 하라. 학교 수업은 절대 빼먹으면 안된다"고 강조할 예정인 그의 연설을 놓고 새 학기를 막 시작한 미국 교육 현장에선 논란이 한창이다. 일부 학부모들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3일 백악관 발표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버지니아 주 알링턴에 있는 웨이크필드 고교에서 연설할 예정이다. 백악관이 인터넷으로 중계하고, 의정활동 중계 전문 케이블 TV 채널인 C-SPAN이 생중계할 예정이다. 앤 던컨 교육장관은 이미 지난주부터 "기념비적인 연설이 될 것"이라며 전국의 교장들에게 편지를 보내 학생들에게 대통령의 연설을 접할 기회를 줄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연설 계획이 알려지자 전국의 교육자치 당국과 학교에 많은 학부모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내 아이를 교육받으라고 학교에 보내는 것이지, (특정한 이념이나 가치관을) 주입받으라고 보내는게 아니다"는 항의와 "우리 학교도 그 연설을 단체 시청할 계획이냐"고 묻는 전화가 섞였다.

미국의 상당수 언론들은 "보수층 학부모들이 반발하고 있다"고 제목을 뽑고 있지만 오바마 지지자 가정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8학년(한국의 중학 2년) 아들을 두고 있는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카운티 거주 크리스틴 웨이크 씨는 3일 동아일보와 통화에서 "나는 오바마 지지자이며 그의 교육철학에 100% 동감한다. 하지만 대통령이든, 교사든 그 누구라도 아이들에게 자신의 주관적 가치관을 직접 전달하는건 우려한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일선 교육자치 당국들은 내부 숙의 끝에 대통령 연설을 단체 시청할지 여부 결정을 일선 학교장에게 위임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교육개혁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계 미셸 리 워싱턴 교육감은 "대통령의 연설은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고 믿지만 시청 여부는 일선 학교장에게 맡겼다"고 말했다.

워싱턴 근교 중산층 거주촌인 버지니아 주 라우든 카운티 교육위원회처럼 단체 시청을 하지 않기로 아예 결정해버린 곳도 있다. 라우든 카운티는 "8일이 개학 첫날이어서 물리적으로도 시청이 불가능하다"며 "다만 교사들이 나중에 수업시간에 동영상 자료를 활용하는건 괜찮다"고 설명했다.

AP통신과 뉴욕타임즈 등에 따르면 텍사스, 플로리다 주 등에도 시청 거부를 결정한 학교들이 상당수다. 일부 보수성향 학부모들은 "만약 학교에서 단체 시청을 계획한다면 등교를 시키지 않겠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공화당과 보수 성향의 라디오토크쇼 진행자들은 "오바마가 교실에서 건강보험 개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떠들지 모른다"고 반대를 부채질하고 있다.

더구나 교육부가 참고용으로 만든 학생 지도 안내문에서 "(연설을 들은뒤) 학생들에게 '대통령을 돕기 위해 나는 어떤 일을 해야할까'를 주제로 글을 써보도록 하라"고 권유해 비판을 자초했다. 교육부는 부랴부랴 학생들에게 권유할 글의 주제를 '장단기적으로 나의 교육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까'로 바꿨다. 백악관은 예상밖의 논란에 당혹스러워하면서 연설 하루전인 7일 연설문을 공개해 학부모들이 미리 내용을 검토할 수 있게 하겠다고 밝혔다.

외형상 이번 논란은 진보성향 대통령의 연설에 보수층 학부모가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예를 보면 그 반대의 경우도 학부모들의 민감한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1991년 조지 H 부시 대통령(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이 워싱턴 시내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라. 마약 하지 말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을때는 민주당 의원들과 민주당 성향 학부모들이 거세게 반발했었다.

사실 '교원경쟁력 강화, 부실 학교 퇴출' 등을 핵심으로 하는 오바마 대통령의 교육개혁 방향은 교원노조 등이 반발하고 보수층은 환영할 내용이다. 하지만 내용에 대한 찬반을 떠나 교실에 정치나 이념이 발을 들여놓는 건 안된다는 학부모들의 생각이 이번 논란의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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