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붕괴 서막 연 20년전 월요시위 아시나요

  • 입력 2009년 9월 5일 02시 51분


한때 32만명 참가… 경찰 무력진압 포기

꼭 20년 전인 1989년 9월 4일 역사적인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의 서막이 열렸다. 여름 휴가철이 끝나고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는 9월, 옛 동독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에서 4일 월요 평화기도회가 재개됐다. 분위기가 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2000명이 넘는 인원이 참석해 교회를 가득 채웠다. 예전에 들렸던 ‘동독을 떠나고 싶다’는 구호 대신 ‘동독에 남겠다’는 새 구호가 등장했다.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에 뒤풀이처럼 이어지는 시위는 월요시위로 불렸고 시위 참가자 수는 매주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10월 23일 최대 32만 명까지 불어났다. 당시 라이프치히 인구는 50만 명이었다. 그리고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당시 니콜라이 교회의 프리드리히 마기리우스 목사는 “국가기관은 여름휴가 동안 모든 수단을 동원해 월요 평화기도회가 새로 시작되는 것을 방해하려 했다”고 지난달 31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증언했다. 니콜라이 교회 월요기도회의 시작은 1982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1989년 들어 월요기도회를 둘러싼 교회와 국가기관의 대립이 커졌다. 5월부터는 교회로 향하는 길목에서 경찰 검문이 시작됐고 월요기도회 시간에 맞춰서는 아예 길이 차단됐다. 그러나 니콜라이 교회는 여름 동안의 휴지기가 끝난 뒤 기도회를 강행했고 그 첫 집회에 교회 내 2000개 좌석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인원이 참가한 것이다. 이후 월요시위의 중요한 고비는 10월 9일이었다. 니콜라이 교회가 올해 라이프치히 월요 시위를 기념하는 20주년 행사를 이날 열기로 할 만큼 역사적인 날이다.

시위대는 동독 정부가 중국 톈안먼(天安門) 사태 식의 강경진압에 나설 것을 우려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대담해져 이날도 최대 규모의 시위를 계획했다. ‘우리가 인민’이라는 유명한 구호도 들려왔다. 동독은 인민이 지배하는 것이지 공산당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이날은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에리히 호네커 공산당 서기장의 명령으로 무력진압 방침이 결정됐다. 하루 종일 경찰 병력이 중심가에 속속 집결했다. 이러다간 많은 사람이 다치겠다는 얘기가 오갔다. 당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가 공산당 간부 3명과 유명 신학자, 유명 개그맨 1명씩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 후에 ‘라이프니츠의 6인’으로 불린 이 모임을 대표해 마주어가 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에는 “사회주의를 더 심화시키기 위한 자유로운 토론이 필요하다. 이 토론이 정부와 함께 이뤄지도록 하자”는 완곡한 내용이 담겼다.

일부 시위대가 체포되긴 했지만 경찰의 무력진압은 무산됐다. 후에 에곤 크렌츠 당시 정치국원은 자신이 무력진압 불가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7만 명이 참가한 이날 시위는 경찰이 개입하지 못함으로써 동독 공산당이 타협에 나설 것임을 분명히 알리는 계기가 됐다.

파리=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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