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40년 만에 유엔총회장에 데뷔한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67)의 연설은 그동안 서방언론에 비친 그의 이미지에 딱 어울리게 독특했다. 그는 23일 유엔총회 개막식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 이어 등단했다.
리비아 외교장관 출신인 알리 트레키 유엔총회 의장이 “혁명의 지도자, 아프리카의 왕 중 왕(king of king)”이라고 거창하게 소개했다. 하지만 카다피 원수는 오바마 대통령이 연설을 마치고 내려간 뒤 텅 빈 연단을 외면하고 주변 사람들과 악수하고 잡담을 나누는 등 17분을 허비한 뒤에야 연단에 올라왔다.
전통의상 차림의 그는 “뉴욕은 너무 멀고 보안이 빡빡하다”며 “유엔 본부를 리비아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또 신종 인플루엔자가 (서방 국가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생물무기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피력했다. 존 F 케네디 전 미 대통령과 마틴 루서 킹 목사 암살에 대한 재조사도 촉구했다.
유엔 안보리에 대해 “상임이사국의 정치적 봉건영지”라며 “안전보장이사회가 아니라 테러 이사회”라고 비난했다. 유엔헌장을 흔들면서 찢었다. 때문에 이어 등단한 존 브라운 영국 총리는 “나는 유엔헌장을 지키기 위해 왔지, 찢으러 온 게 아니다”고 지적했고, 유엔 대변인도 항의 성명을 냈다.
카다피는 또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선 “‘아프리카의 아들’이 대통령이 된 게 기쁘고 자랑스럽다”며 “영구히 대통령으로 남아 있으라”고 제안했다. 이에 앞서 오바마 대통령 연설 때도 열심히 메모하고 박수를 보냈다.
연설은 할당된 15분을 넘겨 무려 96분간 이어졌다. 기진맥진한 통역사가 중간에 교체됐다. 총회장 좌석은 절반 이상이 비었다. 미국 대표단은 연설 시작 전 기록요원 2명만 남기고 총회장을 떠나 별도의 장소에서 연설을 들었다. 사전원고나 프롬프터 없이 메모에만 의존한 그는 시간 초과 경고등은 신경도 안 썼고, 누군가 메모를 건네자 구겨버렸다. 1960년에 피델 카스트로 쿠바 지도자가 미 제국주의를 비난하며 세운 4시간 30분 연설 기록은 깨지 못했지만 상당수 대표단은 일정이 망가졌다고 불평했다.
연설이 끝났을 때 아무도 기립박수를 하지 않았지만 카다피 원수는 승리의 제스처로 두 손을 맞잡고 높이 흔들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정직하다면 누구와도 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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