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초 영국 런던 동남부의 주택가 포리스트힐. 로빈 바잘제트 씨(30)는 자신이 파트타임으로 일했던 유기농 식품점에 들렀다. 이곳 계산대 옆에 놓아뒀던 자선모금함을 찾기 위해서였다.
바잘제트 씨는 10월 11일 열리는 ‘로열파크 하프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두 달 전부터 모금활동을 벌여왔다. 이 대회는 170파운드 이상 기부해야 경기에 뛸 수 있다. 묵직한 저금통을 열자 10센트, 20센트 동전이 우르르 쏟아졌다. 그는 마라톤에 나가기 위해 자선함과 인터넷 모금을 이용해 지금까지 175파운드(약 33만 원)를 모았다.
기부는 돈으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엔 ‘달란트(성경에 나오는 화폐단위로 흔히 ‘재능’이라는 의미로 쓰임)’가 돈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미국과 유럽의 취재현장에선 다양한 방식으로 재능을 기부하는 참신한 시스템을 만날 수 있었다.
○ 모든 재능은 기부할 수 있다
바잘제트 씨에겐 달리기란 재능이 기부의 바탕이 됐다. 영국 최대의 자선단체 연합회인 NCVO(National Council for Voluntary Organi-sations)의 올리버 헨먼 국제담당 이사는 “시민들이 지역사회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재능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부나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 중세부터 이어져온 영국 기부문화의 뿌리”라고 말했다.
미국 뉴욕시 퀸스에 사는 여성 나이니 더 씨(29)는 금융위기를 겪으며 또 다른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달리다 느끼는 최고조의 희열)’를 찾았다. 지난해까지 그는 월가에서 촉망받던 은행원이었다. 하지만 속절없는 경제몰락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가슴 한쪽이 뻥 뚫렸다.
‘이게 진짜 내가 원하던 삶일까.’ 더 씨는 그 길로 뉴욕에 있는 시민단체 파이낸셜 클리닉의 문을 두드렸다. 그는 저소득층 가정이나 학교 등을 방문해 무료 금융 상담을 하고 있다.
더 씨는 “서민의 세금 신고나 구멍가게의 장부 정리를 도울 때 전보다 작은 일을 한다는 느낌은 없다”며 “내 지식과 경험을 보람 있는 곳에 쓴다는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게 재능 기부”라고 말했다.
○ 탭루트재단, 기부자와 대상자 연결
재능을 기부할 곳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 때문에 기부자와 기부 대상을 맺어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둔 탭루트재단은 이런 중개를 목적으로 2008년 만들어졌다. 저소득층이나 정부기관, 비영리단체와 재능 기부자를 이어준다. 생활용품 제조업체인 프록터 앤드 갬블(P&G)에서 브랜드 매니저로 일하는 빌 버기스 씨는 “탭루트가 연결해준 단체에서 마케팅 전략 노하우 등을 전수한다”며 “기부하는 뿌듯함에 새로운 현장도 경험하니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지난달 20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리아힐프 성당. 오전 8시부터 성당 지하에선 빈민구호단체 타펠의 자원봉사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대형마트나 레스토랑에서 들어온 식료품을 나눠주기 편하게 정리했다. 바깥에는 벌써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아이를 앞세운 미혼모나 노숙인 등 20, 30대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반면 자원봉사자는 모두 점잖은 분위기의 50대 이상이었다. 타펠의 현장책임자는 “이곳 자원봉사자들은 의사나 변호사로 일하다 은퇴한 뒤 봉사에 나선 이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음식운반용 트럭을 운전하는 70대 자원봉사자는 변호사 은퇴 후 10년 가까이 타펠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누군가가 버릴 음식을 배고픈 이들에게 전하는 게 우리 일”이라며 “은퇴 후 남는 힘을 일손이 필요한 곳에 쓸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다”고 말했다.
1990년대부터 미국에서 시작된 ‘앙코르 커리어’ 운동도 비슷한 맥락이다. 앙코르 커리어란 상대적으로 풍족한 은퇴자 집단에 속하는 미국 베이비붐 세대(1945∼60년 출생)가 재능 기부를 통해 제2의 인생을 살게 하자는 캠페인이다. 미국 국방부가 운영하는 ‘전역자 교사배치 프로그램’은 이 운동의 대표적 모범사례로 퇴역 직업군인들이 교사 자격증을 딴 뒤 교육 관련 단체 등에서 봉사하도록 돕고 있다.
프랑크푸르트=정양환 기자 ray@donga.com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런던=정재윤 기자 jaeyu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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