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증하는 난민… 팔 벌리던 선진국들도 이젠 ‘팔짱’만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6일 03시 00분


■ 인권 이상과 다른 난민수용 현실
英, 이라크난민 처음 돌려보내
스웨덴-덴마크 등도 수용 거부

케빈 러드 호주 총리 지지율이 최근 급격히 떨어졌다. 10월 중순까지만 해도 60%에 육박했었는데 50%대 초반까지 내려가자 “취임 이후 2년이나 계속돼온 국민과의 허니문이 끝났다”는 말까지 나왔다. 주요국들 중에서 출구전략을 가장 먼저 시행할 정도로 경제가 안정된 호주에서는 이례적인 지지율 변동이다. 왜일까.

월스트리트저널(WSJ)을 포함한 외신들은 뜻밖에 총리의 느슨한 난민 정책을 이유로 꼽는다. 최근 들어 호주에는 내전으로 피폐해진 스리랑카 난민 수가 급증하면서 골칫덩어리로 등장했다. 호주에는 올 한해에만 배 35척에 나눠 탄 1800여 명의 ‘보트 피플(boat people)’이 들어왔다. 야당이 “러드 정부가 난민 정책을 완화한 결과”라며 맹공을 펼치자 국민 불안감도 덩달아 높아지는 상황이다. 다급해진 총리가 “난민을 가장한 불법 이민은 용납하지 않겠다”고 연일 외쳐대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 이상과 다른 현실

급증하는 난민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나라는 호주뿐이 아니다.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는 무조건 수용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경우 예상되는 각종 사회문제와 재정 부담, 국민 반발 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난민들이 발생한 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달라졌거나, 과거 흔했던 정치적 박해로 인한 탈출이 아니라 빈곤 문제에 따른 탈출이 많은 요즘에는 ‘난민’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도 판단이 쉽지 않다.

영국은 지난달 이라크인 난민 신청자 40여 명을 바그다드로 돌려보냈다. 이라크인 난민을 거부한 것은 2003년 이라크와의 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뒤 이라크 재건 작업이 본격화된 만큼 이제는 이라크가 안전하다는 것이 거부 이유였다. 영국은 또 짐바브웨 난민 신청자들도 돌려보내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독재자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이 정적(政敵)이던 모건 창기라이 총리와 연정을 구성하면서 불안한 정국이 끝났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들 난민에게 1인당 2000파운드의 현금과 4000달러 상당의 지원 혜택을 주겠다며 귀국을 종용하고 있다.

스웨덴과 덴마크에서도 난민 신청을 거부당한 이라크인 등을 돌려보내기 시작했다. ‘이민자의 나라’로 알려진 캐나다 역시 보수정권이 들어선 이래 난민 인정 요건을 강화하는 추세다. 지난해 이 나라에서 난민신청을 받아들인 비율은 2005년보다 56%나 낮아졌다. 캐나다 정부는 내년에 입국허용 난민 수를 올해보다 3000명이나 더 줄일 계획이다. 시민권 및 이민부 앨리컨 벨시 대변인은 “현재 우리가 적용하는 난민시스템은 남용되고 있다”며 “정부는 진짜 난민으로 인정받아야 할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혁할 것”이라고 밝혔다.

○ “인권 외면하는 처사”

요즘 난민들 중에는 난민을 가장한 전범들이나 국제 범죄조직들이 섞여 있어 선진국 정부로 하여금 고민에 빠지게 하는 사례도 있다. 실제로 최근 캐나다에 입국한 스리랑카 타밀족 난민 신청자 76명 중 26세의 한 남성은 타밀반군으로 활동한 테러 용의자이다.

정작 ‘진짜 난민’들은 “가족들이 피살된 곳으로 돌아갈 경우 우리도 함께 죽을 것”이라며 결사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상황과 현지 현실이 다르다는 주장이다. 호주 입국을 요구하며 배 안에서 단식 시위를 벌이고 있는 스리랑카 보트 피플은 “젖먹이들을 먹일 우유가 모자란다”고 호소했다.

인권단체들의 비판도 거세다. 이들은 선진국이 난민 신청자들에게 “돌아가면 돈을 주겠다”고 한 것에 대해 “목숨을 내놓으라며 뇌물을 주는 셈”이라고 공격했다. 또 호주의 러드 총리는 인도네시아에 “스리랑카 난민들이 호주 영해로 들어오기 전에 중간에서 막아 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인권단체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았다. 지난주 난민들을 태운 배 한 척이 호주 서북부 바다에 침몰해 13세 소년을 포함한 십여 명이 사망했다는 뉴스는 분위기를 더 악화시켰다. 5일 뉴욕타임스는 호주 ‘크리스마스 섬’ 내 난민 임시수용센터의 현황을 전하면서 인권 운동가들의 말을 인용해 “무너진 꿈의 상징이 된 난민센터가 관타나모 수용소처럼 변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올해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 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난민의 수는 4200만 명(지난해 말 기준)에 이른다. 파키스탄 등지의 분쟁과 기아, 전쟁 등이 장기화되면서 그 수는 늘어날 수 있다고 UNHCR는 경고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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