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살얼음판 정국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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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등 57명 피살… 빈민가 불… 반군단체 31명 탈옥

지난달 23일 정치인과 언론인 등 57명이 끔찍하게 살해당한 참사를 겪었던 필리핀이 일시적 계엄령 선포와 빈민가 화재, 교도소 탈옥 등 연이은 악재로 술렁이고 있다.

AFP통신에 따르면 10일(현지 시간) 필리핀 수도 마닐라의 슬럼가에선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나 판잣집 1000여 채가 피해를 봤다. 7시간 동안 지속된 화재로 1세와 3세 유아 2명이 숨졌고 이재민 1만5000여 명이 발생했다. 이재민들은 천막과 인근 체육관 등 임시거처에 수용됐으나 대부분 열악한 극빈층이라 생계가 막막하다.

무장 괴한이 정부시설을 공격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AP통신은 “13일 필리핀 남부 바실란 섬 이사벨라 시에 있는 정부 교도소가 공격당해 최소 31명의 죄수가 탈옥했다”고 전했다. 이 과정에서 교도관 1명과 무장괴한 1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슬람 게릴라로 추정되는 무장 세력은 이날 밤 총격전과 함께 교도소 콘크리트 벽을 부수는 대담한 방법으로 죄수들을 탈옥시켰다. 알 라시드 사칼라훌 바실란 섬 부지사는 “필리핀 최대 이슬람 반군단체인 ‘모로이슬람해방전선(MILF)’과 알카에다 연계조직인 ‘아부 사야프’ 소속 죄수들이 달아났다”고 밝혔다. 이사벨라 교도소는 2004년 4월에도 이슬람 무장단체 출신을 포함한 죄수 53명이 탈옥한 적이 있다.

여기에 일시적인 계엄령 선포 뒤 인권침해 사례까지 겹치면서 필리핀 정국을 흔들고 있다. 글로리아 아로요 대통령은 지난달 참사가 벌어졌던 마긴다나오 주에 참사 배후로 꼽히는 암파투안 가문의 반란 조짐을 이유로 5일 계엄을 선포했다. 그러나 일주일 만인 12일 “반란 움직임이 저지됐고 질서가 회복됐다”며 해제했다. 필리핀에 계엄령이 선포된 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권이 물러난 1986년 이후 처음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이 기간에 암파투안 추종 세력을 포함한 최소 247명이 영장도 없이 체포됐다. 야당 등은 “필리핀 헌법상 계엄령은 외적 침입이나 국내 반란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만 선포할 수 있다”며 “참사를 빌미로 법을 기만하고 장기집권을 도모하려는 술수”라고 비난했다. 현 정부의 지지율은 마르코스 정권 이래 가장 낮은 상태. 아로요 대통령은 1일에는 퇴임 뒤 내년 하원의원 선거 출마를 선언해 논란을 빚고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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