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으로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관습과 관념에 굴복하지 말고 도전하세요. 세상의 변화는 당신에게서 시작됩니다.” 루스 시먼스 미국 브라운대 총장(64)의 인생 얘기를 듣다 보니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했다.
시먼스 총장은 미국 남부 텍사스의 목화 농장에서 소작농 아버지와 하녀 어머니 사이의 12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아이비리그 대학의 첫 흑인 총장에 올랐다. 흑백분리 정책으로 고등학교 때까지 백인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해 본 적이 없던 그는 하버드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부모 형제로부터 한 푼의 학비 도움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당시 텍사스에서 백인 학생도 받기 쉽지 않았던 풀브라이트 장학금까지 받았다.
15일 뉴욕 주 인근 로드아일랜드 주 프로비던스에 있는 브라운대 총장실에서 그가 어떻게 흑인과 여성이라는 ‘유리천장’을 극복했는지 들어봤다.》 “여성차별이 당연하던 시절, 대학서 만난 여성총장님은 교수가 되겠다는 꿈 심어줘”
“‘유리천장’ 한국여성들도 도전적 삶 살아야하고 평등에 대한 신념 가져야”
―농장에서 자랐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은 어땠나.
“텍사스 동부 그레이프랜드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곳에는 농장들이 많았는데 아버지는 목화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일했다. 그 대가로 농장의 작은 집에서 살 수 있었고 겨우 생필품을 살 만한 적은 보수를 받았다. 어머니는 농장에서 허드렛일을 거들었다. 나도 언니 오빠들과 함께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밭에 나가 일을 도와야 했다. 당시 흑인들은 매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다. 흑인 가족은 농장에서 일하는 것 말고 다른 삶을 꿈꿀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지도 못했다. 오빠들은 농장을 벗어나기 위해 군대에 입대했고 덕분에 나는 7세 때 휴스턴으로 이사할 수 있었다.”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을 텐데….
“물론이다. 농장 집에는 종이도 없었고 연필도 없었다. 책이라고는 성경이 전부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6세 때 학교에 갔을 때 교실은 놀이터 같았다. 난생 처음 연필 종이 책 등을 구경할 수 있었다. 공부가 즐거웠다. 일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는 농장에 살던 내게 학교 생활은 혁명이었다. 도시 학교보다 훨씬 떨어지는 학교였지만 내게는 더 바랄 게 없었다.”
―부모님은 공부를 잘한다고 좋아하셨나.
“내 부모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 공부에 대한 나의 열정을 참아 넘기기는 했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독려하지는 않았다. 당시는 흑인들이 교육을 활용해 신분 상승을 꾀하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흑인들에게 허용된 것은 육체노동뿐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것을 두려워했다. 백인들과 똑같이 살려고 하다가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브라운대 총장 임명 소식을 듣고 어머니 생각에 울음을 터뜨렸다고 들었다.
“열심히 살았던 어머니를 존경했다. 어릴 때 돌아가셨다. 내가 대학에 가고 싶다고 하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면 가보라’고 하시던 어머니가 얼마나 좋아하실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집에서 단 한 푼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 개인 장학재단에서도 장학금을 받았고 휴스턴에서 1000달러의 장학금을 받았다. 고등학교 선생님 한 분은 내가 꼭 대학에 가야 한다며 루이지애나 뉴올리언스에 있는 흑인 학교인 딜라드대에 찾아가 내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줬다. 때때로 오빠 언니들도 1달러, 5달러, 10달러 정도씩 송금해 줬다.”
―여성이기 때문에 더 어렵지 않았을까.
“내가 어렸을 때 남녀 차별은 당연한 것이었다. 성차별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는 매우 엄하고 어머니는 순종적인 아내였다. 딸보다 아들이 우선이었다. 식사 시간이 되면 아버지와 오빠들이 먼저 먹고 어머니와 나를 비롯한 딸들은 식사 수발을 들었다. 아버지와 오빠가 식사를 끝내고 나서야 어머니와 딸들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뒤로 밀리는 것은 항상 당연시됐다. 나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내가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 되지 않기 위해 애썼다. 1등이 되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공부를 덜 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쫓아가는 1등이 되지 않았나.
“대학 3학년 때 웰즐리대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간 공부한 적이 있다. 이때 난생 처음으로 백인 학생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해 봤다. 학생들이 매우 우수해 많은 자극을 받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게 큰 충격이었던 것은 당시 총장이 여자(마거릿 클랩)라는 사실이었다. 이분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일을 하고 있었다. 여자는 어디에서도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하던 내게 충격이었다. 여성의 권리 증진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믿는 분이었다. 이분은 내게 또 다른 꿈을 심어줬다. 교수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학교로 돌아와서 대학원을 가기로 결심했다. 또다시 여기저기 각종 장학금과 펠로십을 신청했다. 별 생각 없이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신청했는데 운 좋게 선발됐다. 텍사스에서 그것도 흑인 학생이 이 장학금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버드대 대학원에 원서를 냈는데 합격을 했고 여기에서도 장학금을 받았다.”
―미국 사회에는 아직도 여성 차별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나.
“물론이다. 단적으로 말해 여자들은 사회에 나와 직장에 들어가면 똑같은 능력을 가진 남자 동료에 비해 보수가 훨씬 떨어진다. 승진도 더디게 이뤄진다.”
―‘유리천장’ 때문에 좌절할 수도 있는 미국 또는 한국의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특별히 다른 얘기는 아니지만 매우 중요한 얘기다. 도전적인 삶을 살라는 것이다. 사회의 잘못된 관습이나 관념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1955년 많은 사람이 백인과 흑인이 버스에서 따로 앉아야 한다는 걸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로자 파크스 여사는 이런 관념에 도전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거부했고 이는 결국 미국 사회를 뒤흔든 흑인 인권운동의 발단이 됐다. 평등에 대한 신념을 가져라. 나는 지금껏 무엇인가 성취하려고 살지 않았다. 다만 나 자신이 다른 누구와도 평등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일하라. 그리고 남에게 의존하지 말고 독립적으로 생각하라.”
―총장 취임 직후 브라운대 역사상 최대 규모인 14억 달러의 기금 모금 목표를 세워 성공했다고 들었다.
“사립대이기 때문에 교육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또 미국의 사립대는 여성이나 소수민족을 총장으로 임명하기를 꺼렸다. 대학 기금 출연이 줄어들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래서 더 적극적으로 기금을 모았다. 기금 덕분에 교수진을 690명으로 100명 정도 늘렸고 장학금 혜택도 늘렸다.”
―학생들에게 세상과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친다고 하는데 이유는….
“오늘날의 세계는 함께 움직인다. 우리는 매일 다른 문화, 다른 종교, 다른 민족의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사람 간의 관계는 생산적이고 지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편견을 최대한 없애고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사람과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생각한다. 교육을 통해 다른 세상, 다른 사람을 제대로 이해하도록 가르치면 결국 국가 간의 관계도 개선될 수 있고 폭력도 줄일 수 있으며 인류의 복리도 증진될 수 있다고 믿는다.” “브라운大에 세운 ‘김구도서관’ 보며 학생들 많이 배울것”
―브라운대가 국제화 교육을 중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인가.
“그렇다. 내가 처음 임명한 국제담당 부총장이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세계 대학을 돌며 공동연구나 교환학생 프로그램 등 협력관계를 맺는다. 지금도 한국 등 세계 많은 대학과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올해 4월에 브라운대에는 ‘김구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한국인들이 존경하는 김구 선생을 기념하는 도서관을 둘러보면서 브라운대 학생들은 많은 것을 느낄 것이다. 미국인들은 조지 워싱턴 같은 미국 건국 지도자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미국만이 자유를 위해 싸운 유일한 나라인 것처럼 말한다. 브라운대 학생들은 한국의 김구 선생처럼 다른 많은 나라도 자유를 위해 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학생들에게 훗날 지도자가 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던데….
“세계의 우수한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학생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교육을 통해 다른 세상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 이들은 엔지니어링을 배우고 의학을 배우고 행정의 중요성을 배운다. 모든 학생은 자신이 언젠가는 어떤 분야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준비를 해야 한다. 내가 텍사스의 농장에서 자랄 때 지금의 지도자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어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학창 시절 자신이 언젠가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 배우고 생각하고 준비해야 한다.”
-1945년 미국 텍사스 주 그레이프랜드의 목화 농장에서 12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67년 뉴올리언스 소재 흑인 대학 딜라드대 졸업 -1967년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 -1973년 하버드대 영문학 박사 학위 취득 -1973∼1983년 남캘리포니아대(USC) 교수 -1983∼1990년 프린스턴대 교수 -1990∼1992년 스펠먼대 교무학장 -1992∼1995년 프린스턴대 교수 -1995∼2001년 스미스대 총장 -2001년∼현재 브라운대 총장 -2001년 타임 ‘미국 최고의 총장’으로 선정 -2002년 뉴스위크 ‘올해의 여성’으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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