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폭증 크리스마스땐 노사 휴전” 英우편노조 총파업 끝내
너무 다른 韓美獨 자동차 노조
1만명 해고 항의 오펠 파업도
거리행진하며 며칠만에 종료
쌍용차 같은 격한 갈등 없어
기업 경쟁력 ‘직원존중’ 문화
듀폰-HP 등장수기업들
최고의 가치는 ‘사원=가족’
위기때 노사협력 진가 발휘
《지난해 12월 15일 기자가 방문한 스페인에서는 철도노조의 파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철도관리원과 기관사들이 가입한 노조는 경제위기에 따른 인원 감축을 반대하고 근무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파업을 벌였다. 하지만 철도역은 대부분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철도노조의 상급 단체인 일반노동자연맹(CGT)의 레예스 가냐베라스 홍보담당은 그 이유를 “법적인 테두리 내에서 파업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급진적인 노동단체로 평가받지만 한국의 시각에서 보면 온건파에 가까웠다. 그는 “우리는 기관차를 멈추는 파업은 하지 않는다”며 “대규모 파업을 하면 언론의 주목을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합법적인 선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 기업들이 인력 구조조정에 나서면서 노사 관계가 세계 경제의 새로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일부 파국을 맞는 사례도 없지 않지만 많은 나라에서는 노사 화합을 통해 일단 위기를 넘기고 파이를 키우자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사회주의의 전통이 깊은 유럽조차도 한국과 같은 ‘전투적 노동운동’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합리적인 길을 찾는 유럽의 노동운동
스페인 마드리드 구도심에 위치한 CGT 사무실에서 만난 노조 관계자들은 ‘법 테두리 내에서의 노동운동’을 거듭 강조했다. 안드레스 알바레스 CGT 대표는 “1990년대 초 대형 노조 두 곳이 전면 파업을 벌인 적이 있지만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결국 아무 소득 없이 파업을 접어야 했다”며 “그 이후부터 이런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노동자의 이익을 키우는 것이 목표인 것은 분명하지만 요구사항을 관철하기 위해 무조건 목소리를 높이고 불법을 저지를 계획은 현재로서는 없다”고 덧붙였다.
실제 스페인 철도노조는 전면 파업보다는 금요일, 주말 등 승객이 많은 시간에 창구 직원이 단체로 연가를 내는 일종의 ‘준법 투쟁’ 방식으로 파업을 벌이고 있었다.
영국에서도 지난해 10월 29일 국영 우체국인 로열메일 노조가 총파업에 들어가면서 평소 사나흘 걸리던 우편 및 고지서 배달이 보름씩 지연됐다. 노조는 ‘우편 현대화’로 일자리가 없어지는 걸 좌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첨예한 대립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눈 녹듯 사라졌다. 사측은 “우편물이 한꺼번에 몰리는 크리스마스 때 정상적인 업무가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고, 노조는 이를 받아들여 11월 10일 파업을 끝냈다. 우편 현대화 작업을 진행하되 노사가 함께 보수를 포함한 각종 이슈를 의논해 나가기로 잠정 합의했다.
배규식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영국에서는 공무원도 파업을 할 수 있을 만큼 노동자의 권리가 폭넓게 보장돼 있지만 노동운동은 매우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 한국 미국 독일 자동차 노조의 엇갈린 풍경
미국 최대의 자동차 제조업체 제너럴모터스(GM) 직원들은 지난해 유난히 힘든 한 해를 보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GM은 지난해 6월 1일 법원에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각종 구조조정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2008년 말 기준으로 6만1000여 명인 미국 내 근로자를 올해 말까지 4만 명으로, 같은 기간에 공장을 47개에서 34개로 줄여야 한다. GM 노조의 상급단체인 전미자동차노조(UAW)는 2015년까지 GM에서 파업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 이뤄지고 있지만 노사가 충돌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김정한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은 ‘일시해고’의 개념이어서 퇴사했다가 다시 경기가 좋아지면 복귀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에 한국의 노조처럼 전투적이지 않다”고 설명했다.
GM 파산은 독일에도 큰 충격파를 던졌다. GM이 지난해 11월 초 독일 뤼셀스하임에 본사를 둔 유럽법인 오펠의 직원 5만여 명 중 1만 명을 해고하는 구조조정안을 발표하자 11월 15일 오펠 노조의 반(反)GM 집회가 열렸다. 이날 노동자들은 GM과 오펠의 로고가 새겨진 검은 관을 들고 본사 인근을 행진하며 GM 규탄 시위를 벌였다. 오펠 노동자뿐만 아니라 독일 정부와 사회도 GM에 분노했다. 이처럼 사회적 공감대를 업은 오펠 노조의 파업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조병휘 KOTRA 구주지역본부장 겸 프랑크푸르트KBC 센터장은 “독일의 금속노조도 꽤 강성인데 파업은 며칠 만에 끝났고, 시위 역시 거리행진에 그쳤다”며 “첨예한 갈등 사안을 놓고도 법 테두리를 벗어난 시위나 집회는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 자동차업계도 시련을 맞았다. 지난해 1월 법정관리를 신청한 쌍용자동차가 5월 8일 전 직원 7000여 명 중 2400여 명을 해고한다는 신고서를 노동부에 제출하자 노조의 총파업이 8월 6일까지 77일 동안 계속됐다. 노조는 총파업과 동시에 공장을 점거했고, 회사 측과의 격한 갈등 속에서 쇠파이프와 새총이 등장하기도 했다.
○ 직원 존중 문화로 기업 경쟁력 도모
주요국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노사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고 있다. 김태정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불황이라는 위기를 극복하려면 노사가 위기의식을 공유해야 한다”며 “불황기는 노사관계의 옥석이 가려지는 시험기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회사 측이 앞장서서 노사 화합을 이끌어가려는 노력도 선진국 기업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일본의 분쇄기 제작 중소기업인 나라기계제작소는 1933년에 설립된 이래 지금까지 ‘이익 배분 육각형’ 원칙을 지키고 있다. 고객, 종업원, 주주, 구입처, 경영자, 지역사회 등 6개 섹터에 회사가 얻은 이익을 배분한다는 원칙이다. 그 밑바탕에는 ‘사원은 가족’이라는 기업문화가 깔려 있다.
미국에서도 ‘직원 존중’을 핵심 가치로 여기는 기업들이 오랜 역사 속에서 업계 최고의 지위를 유지한다. 듀폰(207년), P&G(172년), 코닝(141년), HP(70년) 등이 대표적인 기업이다. 이들 장수기업은 안정된 노사관계를 핵심 경쟁력으로 삼아 위기 때마다 노사협력의 진가를 발휘해왔다. 리처드 듀프리 전 P&G 회장은 “누가 우리의 돈, 건물, 브랜드를 남겨 놓고 직원들을 데리고 떠난다면 우리는 망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지고 가더라도 직원들을 남겨둔다면 10년 안에 일어설 것이다”라고 말해 직원 존중 이념을 강조하기도 했다. ■ 한국 노사관계 전문가 점수는? 100점 만점에 45점
■ 현재 노동방식 국민들 생각은? ‘전투적’ 58.6%
‘100점 만점에 45점.’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2010 G20서 2020 G10으로’ 신년기획과 관련해 지난해 12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전문가들이 한국의 노사관계에 대해 매긴 점수다. 설문에 응한 전문가 50명은 한국 경제가 G10 반열에 오르기 위해 힘써야 할 8개 항목 가운데 노사관계가 가장 취약하다고 평가했다. 각종 국내외 조사에서도 노사관계는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로 꼽힌다.
지난해 한국은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의 세계경쟁력 평가에서 27위, 세계경제포럼(WEF)의 국가경쟁력 평가에서 19위에 그쳤다. 취약 부문은 노사관계였다. IMD 조사에서는 한국의 노사관계 경쟁력이 57개국 중 56위, WEF에서는 133개국 중 131위로 꼴찌 수준이었다.
국민의 시선도 곱지 않다. 지난해 12월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성인 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현재의 노동운동 방식에 대해 58.6%가 ‘전투적’이라고 답했고, ‘합리적’이란 응답은 8.7%에 그쳤다. 노조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빨간 머리띠와 복면, 조끼’ ‘공장 점거, 파업’ ‘화염병, 쇠파이프’ 등이었다.
김태기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해외에서는 언론을 통해 폭력적인 파업을 주로 전해 듣다 보니 실제보다 위험을 크게 느끼는 측면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국내에서도 외면을 받는 건 노동운동이 국민 정서에 반하는 정치적, 이념적 노선으로 흐르는 데다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명분 없는 파업이 많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전자업계의 한 임원은 “노사가 서로를 협력 파트너로 인식해야 회사가 더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다시 직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팀장=박현진 경제부 차장 ▽미국 영국=박형준 기자 ▽핀란드 프랑스 스위스=정재윤 기자 ▽싱가포르 카타르 아랍에미리트=이세형 기자 (이상 경제부) ▽독일 오스트리아=강혜승 기자 ▽스페인 중국=한상준 기자 (이상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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