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물 무너져도 안 피한 남자… 그의 품엔 막내딸이 있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6일 03시 00분


■ 재난 현장의 드라마들

딸 살리고 죽은 아빠 사연에 엄마고향 뉴질랜드 울음바다
깔린 아내의 손 알아본 남편, 맨손으로 파내 구조하기도

강진이 휩쓸고 간 절망의 땅에도 기적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아이티 지진 4일째인 15일 각국 외신은 재난의 현장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의 소식을 전했다.

뉴질랜드 출신 유엔 직원 에밀리 상송르주이 씨(37·여)는 하루 사이에 지옥과 기적을 모두 맛보았다. 직장에서 만난 아이티인 에마뉘엘 상송르주이 씨(39)와 결혼한 그는 이곳에 정착해 세 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뤘다.

행복했던 상송르주이 씨 가족을 한순간에 헝클어뜨린 건 12일 찾아온 강진.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유엔 사무실에서 근무하던 에밀리 씨는 지진이 일어나자 위험을 무릅쓰고 가족이 있는 카리베 호텔로 무작정 달려갔다. 무너진 건물 근처에서 들리는 “살려 달라”는 울음소리는 두 딸 코피 양(5)과 젠지 양(3)의 목소리였다.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는 두 딸을 구할 방도가 없었다. 두 딸을 가로막은 커다란 건물 잔해를 치울 수가 없었다. 절박한 심정에 맨손으로 흙더미를 파헤쳐 봤지만 그 사이 두 딸은 숨지고 말았다. 엎친 데 덮친 격일까. 남편도 잔해 속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하지만 재앙이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가지는 않았다. 함께 숨진 줄 알았던 두 살배기 막내 알리아나 양이 남편의 시신 아래서 구조된 것이다.

호주 일간지 ‘헤럴드 선’은 “호텔이 무너질 때 아버지가 온몸으로 막내딸을 위한 공간을 확보했던 것 같다”고 보도했다. 그 덕분에 막내딸은 다리만 부러졌을 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상송르주이 씨 가족의 이야기가 전해지자 호주와 뉴질랜드는 슬픔에 잠겼다. 알리아나 양은 도미니카공화국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아내를 찾으러 6시간이나 차를 타고 달려온 남편도 아내를 구하는 데 성공했다. NBC코네티컷은 ‘남편이 본 건 아내의 손이 전부였다(All husband saw was her hand)’라는 기사에서 미국인 프랭크 소프 씨의 감동적인 사연을 전했다.

12일 아이티 변방에 있었던 소프 씨는 지진이 일어나자 포르토프랭스에서 선교활동을 하는 아내 질리언 씨를 떠올렸다. 아내를 구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밤새 6시간이나 차를 몰아 지진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아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의 귀에 절규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고 건물 더미 밖으로 삐져나온 눈에 익은 손이 보였다. 대화를 나누며 아내를 진정시킨 그는 1시간 동안 벽돌과 철근을 일일이 손으로 옮긴 끝에 아내를 구출했다.

미 CNN방송은 15일 무너진 철근 구조물에 오른쪽 다리가 끼인 채 신음하고 있는 11세 소녀의 모습을 생중계했다. 여러 명의 구조대원이 24시간 내내 맨손으로 잔해를 파헤쳐 봤지만 건물 잔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태가 악화되자 소녀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다리를 절단하고 꺼내야 할 상황이 왔다. 하지만 뒤늦게 전기톱과 발전기 등이 도착하면서 구조작업이 빨라졌고 소녀는 매몰된 지 만 이틀 만에 구출됐다.

이 밖에 MSNBC는 지난해 말 아이티 보육원에서 아이 두 명을 입양하기로 한 미국인 부부 켄드라 실렌베이커 씨와 남편인 브렛 씨의 이야기도 보도했다. 지진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했던 부부는 밤새도록 인터넷 사진들을 보며 아이들을 찾았고, 다음 날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전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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