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유성열]“Help me” 손 내밀던 아이티 소년… 누가 일으켜 줄 것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월 19일 21시 18분


아이티 수도 포르토프랭스의 중심지인 델마 지역. 이번 지진 피해가 집중된 곳이다. 승용차 한 대를 빌려 17일(이하 현지시간) 오전 이곳을 둘러봤다. 델마는 '생지옥'이란 표현이 적당했다.

먹을거리를 찾으러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시신 썩는 냄새를 피해 마스크를 뒤집어썼다. 길가에 너부러진 시신들은 나무처럼 굳어 썩어갔다. 30도를 넘는 무더위 때문에 시신들은 금방 부패해졌다.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다 숨을 거둔 사람들도 콘크리트 더미 사이로 듬성듬성 보였다. 유엔평화유지군은 곳곳에서 중장비를 동원해 참사 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불도저로 잔해더미를 퍼내면 시신 여러 구가 걸려 나왔다. 군인들 가운데 일부는 장갑차로 돌아가 방독면을 꺼내들었다.

주저앉은 대통령궁 근처의 한 종합병원 앞마당에는 천막과 나무로 만든 임시병동이 차려졌다. 이 곳은 상처가 썩어가는 이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했다. 관절이 뒤틀린채 그대로 굳어가고 있는 환자들은 의사만 애타게 부르다 정신을 잃어 갔다.

한 소년은 카메라를 들이대자 "Help me(도와주세요)"라고 외치며 기자의 팔목을 잡았다. 목소리조차 낼 힘이 없어 멍하니 누워있는 할머니는 가슴에 남은 상처가 썩어 금세 숨을 거둘 듯했다. 각국에서 몰려든 자원봉사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했지만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료진들은 특히 "마취제가 없어 수술을 못하고 있다"고 허탈해 했다.

치안상황이 나빠지면서 구호활동마저 더디게 진행되자 희망을 잃은 사람들은 콘크리트 잔해 위에 앉아 멍하니 하늘만 쳐다봤다. 구호품을 실은 비행기 수십 대가 하늘을 오고 갔지만 여전히 먹을 물조차 부족해 길바닥 구정물도 모아야 했다.

주 아이티 미국 대사관 앞에는 아침만 되면 기다린 띠가 생겼다. 미국 비자를 받으려는 아이티인들은 몇날 며칠이라도 기다릴 태세였다. 캐나다 대사관도 비슷했다.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향하는 버스 터미널도 하루 종일 북적였다. 버스에 오른 자들은 '고향을 떠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구호물자가 풀리는 곳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유엔평화유지군이 몰려드는 사람들을 통제하자 굳게 닫힌 문 앞으로 모인 이들은 금세라도 폭동을 일으킬 듯 소리를 질러댔다.

기자는 18일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원들과 함께 철수에 나섰다. 아침 일찍부터 시내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기자가 탄 버스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혹시나 물품을 싣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때 거리를 점거한 사람들 때문에 버스가 고립되는 상황도 벌어졌다. 전날 흥분한 군중들이 불을 지르고 유엔군과 대치하는 모습을 본 터라 두려움이 몰려왔다. 우리 일행은 커튼을 치고 골목길을 돌아서 한적한 곳으로 나가서야 다행히 국경으로 향하는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아이티 현지에서 만난 한국인들은 아이티인들에 대해 "하나같이 똑똑하고, 배움에 대한 열정이 높다"며 "충분한 교육시설과 산업인프라만 구축되면 급성장할 가능성이 높은 민족"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런 민족을 가진 나라가 한 순간에 '생지옥'으로 변한 현장을 떠나며 마음이 아려왔다. 이들이 다시 자립할 날은 언제일까.

포르토프랭스(아이티)=유성열 기자 r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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