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사회학자이자 상원의원인 앤서니 기든스 경을 19일 영국 웨스트민스터 상원건물 입구에서 만났다. 상원의원은 방문자를 입구까지 직접 내려와 맞는 관행이 있다.
하원 건물은 커튼 카펫 의자 등 내부의 주조색이 소박한 녹색인 데 비해 상원 건물은 적색이라 느낌이 아주 달랐다. 안에는 티룸도 있고 펍(pub)도 있다. 작은 마을 같다. 기든스 경과 마주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의 책 ‘기후변화의 정치학’ 얘기를 했다. 기든스 경과 티룸에서 마주 앉았다.》
“너무 춥다고? 온난화는 현실이다, 강력하고 피할수 없는” ―북반구에서 올겨울은 유난히 춥다. 그런데도 지금 지구온난화를 확신하는가. 과학적 진실이 우리가 보고 느끼는 것과 다를 때 어떻게 지구온난화의 위기가 실재한다고 받아들일 수 있나.
“웨더(weather)와 클라이밋(climate)을 구별해야 한다. 웨더가 그날그날의 날씨를 의미한다면 클라이밋은 일정 기간 날씨의 평균을 의미한다. 또 웨더가 지구상의 어떤 특정 지역의 기후를 의미한다면 클라이밋은 전 지구에 걸친 기후를 의미한다. 최근 영국은 추웠지만 이웃나라 아일랜드는 예년보다 훨씬 따뜻했다. 지구온난화는 웨더가 아니라 클라이밋에 관련된 것이다. 지구온난화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단순히 덥다, 춥다가 아니라 극단적인 기후 패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호주는 오랜 기간 가뭄에 시달리고 영국은 예전보다 훨씬 빈번한 홍수에 시달린다. 최근 아이티 지진은 지구온난화와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크다. 그건 자연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준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은 강력할 것이고 게다가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다.”
―‘2012’란 영화를 본 적이 있나. 지구 종말에 관한 영화다. 우리는 오늘날 지구 종말을 주제로 다룬 소설 영화 만화에 둘러싸여 있다. 지구온난화도 이런 유행 중 하나가 아닌가.
“그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어쨌든 일반인은 이런 종류의 지구 종말 얘기와 기후변화를 거의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픽션과 현실을 구별해야 한다. 기후변화는 현실이다. 기후변화는 세계 각국의 과학자 100여 명이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를 통해 과학적 발견에 기초해서 내린 결론이다. 물론 미래 위험을 100%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시한다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2012’ 대신 괜찮은 영화를 하나 소개하고 싶다. 지난해 영국 여성감독 프래니 암스트롱이 만든 ‘에이지 오브 스튜피드(Age of Stupid)’라는 영화다. 기후변화를 다룬 이 영화로 영국에서는 201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지난해보다 10% 줄이기 위한 10 대 10 캠페인이 시작됐다.”
―지난해 펴낸 저서 ‘기후변화의 정치학’에서 기후변화는 좌·우파의 문제가 돼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어떤 의미인가.
“기후변화 정책은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 기후변화 정책은 미래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새로운 경제와 사회를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나라인 미국을 보자. 나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 기후변화 이슈에서 일부 공화당의 지지를 받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가 목격한 것은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의 정치적 양극화다. 그 결과는 글로벌한 차원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바마는 덴마크 코펜하겐 회의에 참석했지만 내놓을 제안이 없었다. 좌우 대립을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가능한 곳에서 어떻게든 ‘정치적 대타협(political concordat)’을 이뤄내야 한다. 기후변화 정책은 정권의 부침과 상관없이 살아남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정권 교체에 흔들리지 않고 장기적 목표에 천착하는 ‘공무 영역(civil service)’을 확보해야 한다.”
―환경운동과 기후변화 정책은 어떤 관련이 있는가.
“환경운동은 기후변화를 정치적 의제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지만 그 자체는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환경운동가들이 가진 극단적인 탈집권화, 제로 성장 사회, 비폭력 같은 신조는 현실 정치와 부합하지 않는다. ‘자연으로 돌아가자’ 같은 구호는 지키려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구온난화와 싸우는 것과는 상관없다. 환경운동가들은 ‘지구를 구하자’는 말을 흔히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기후변화 정치는 지구를 구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 지구 자체는 우리가 무엇을 해도 살아남는다. 문제는 거기에 사는 사람이다.”
―원자력 발전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원자력은 신뢰할 만하고 경쟁력이 있는 친환경 에너지원이다. 그러나 원자력은 핵 확산, 테러리즘과도 관련돼 있기 때문에 복잡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계 주요국에서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맞추기 위해 원자력 발전을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국제적인 핵 관리의 진전이 없는 상태에서 원자력 발전을 대규모로 확대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원자력과 핵무기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북한과 이란이 원자력으로 핵무기를 만드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핵 확산과 관련해서 중동은 특히 위험한 곳이다.” ▼“향후 20년 저탄소 녹색혁명 시대깵 일자리도 많이 생길 것”▼ ―기술 발전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기술의 발전은 ‘저탄소 경제(low carbon economy)’를 이루는 데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 재생에너지 기술을 중심으로 해서 저탄소 경제로 가기 위한 더 큰 산업혁명의 시작단계에 있다. 최근 20년간 정보기술(IT)이 세계 경제를 이끌었듯이 앞으로 20년은 새로운 환경기술이 세계를 이끌 것이다. 재생에너지 기술 없이 저탄소 경제로 이행할 수 없다. 중국과 인도는 지금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들 국가가 단순히 옛 서방 선진국의 길을 따른다면 그것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오늘날 중국과 인도의 리더십이 서서히 인정받고 있다. 이들 국가가 새로운 발전모델을 찾는 데 기술 혁신은 아주 중요하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개념 대신에 ‘녹색 성장’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나는 녹색성장을 저탄소 경제로 가기 위한 출발이라고 보며 그 개념에 매우 호의적이다. 한국이 광범위한 지속가능한 투자에 힘을 기울이기로 한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런 이행 과정을 통해 일자리를 더 만들 수 있을지 지켜보고 있다. 사람들이 이제는 기후변화 정책을 비용이 더 드는 골치 아픈 문제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를 제공하는 것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분야에서 더 많은 진전을 이루는 나라일수록 글로벌화된 저탄소 경제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제3의 길’의 이론가로 유명하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은 기후변화에 관한 제3의 길을 모색하는 것인가.
“아니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은 좌파, 우파의 구별을 넘어선 문제를 다룬 것이다. 제3의 길은 글로벌 시대에 대응해 전통 좌파와는 다른 중도 좌파의 새로운 전략을 모색한 것이다.”
―당신의 부지런함과 끈기에 늘 놀란다. 70세가 넘도록 책을 2년에 한 권, 어떨 때는 한 해에 한 권 펴내고 있다. (기자가 나이를 확인하기 위해 ‘72세가 맞느냐’고 물으니 ‘완전히 틀렸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기자가 놀라 ‘그럼 몇 살이냐’고 물으니까 ‘29세’라고 했다. 기자가 폭소를 터뜨리자 그가 ‘어쨌든 질문을 계속하고 보자’고 말했다.) 어떻게 그 나이에도 계속 그렇게 일할 수 있나.
“내가 좋아하는 모토 중 하나는 윌리엄 베버리지의 것이다. 그는 영국 복지국가 건설의 아버지 중 한 명으로 유명한 ‘베버리지 보고서’의 저자다. 그가 80세가 됐을 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전히 급진적이 되기에 충분할 만큼 젊고 여전히 누군가가 산을 옮길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게 나의 모토이고 우리가 따라야 할 아주 좋은 모토라고 생각한다.”
런던=송평인 특파원 pisong@donga.com 앤서니 기든스는… 1998년 ‘제3의 길’ 주창 좌파의 중도화 이끌어 앤서니 기든스 경(72)은 세계적 명성을 지닌 영국 사회학자. 1987년 케임브리지대 교수, 1997 런던정경대(LSE) 학장 등을 지냈으며 2003년 이후 LSE 석좌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초기에는 사회학 연구에 집중했으나 1990년대 이후 모더니즘이 사회 및 개인에게 미친 구체적 결과를 탐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998년 그가 제시한 ‘제3의 길’은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와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등에게 영향을 미쳐 좌파의 중도화를 이끌었다. 2004년 영국 노동당 소속의 1대 종신 상원의원이 됐다. 지난해에는 환경 문제를 다룬 ‘기후변화의 정치학’을 펴내 또다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주요 저서로 ‘사회학’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 ‘모더니즘과 자아정체성’ 등이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