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개월을 하루 한끼 연명… 63kg 몸무게 몇달새 38kg으로”
임진강 배치후 중공군에 잡혀
열아홉밤 걸어 압록강변 도착
탈출하다 잡히면 동굴 감금
고기 달라고 아우성치자
포로 400명에 닭 6마리 나와
굶어죽는 동료만 40명 목격
그는 드럼부대 소속이었다. 기상과 취침 시간을 알리는, 전투와는 거리가 먼 부대였다. 그런 그에게 파병 명령이 떨어졌다. 지도를 펼치고서야 ‘코리아’라는 낯선 나라를 찾을 수 있었다. 그해 봄은 화창한 날씨마저 두렵게 느껴졌다. 전선에 배치된 지 사흘 만에 그는 중공군의 총부리 앞에 서야 했다. 28개월의 포로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 6·25 최대 전투가 벌어진 1951년 봄
열아홉 살의 테드 로즈 이병은 1951년 3월 4일 영국 글로스터연대 소속 병사 200여 명과 함께 한국 땅을 밟았다. 한 달 보름 남짓 전투훈련을 받은 로즈 이병은 4월 22일 경기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 임진강변의 본부중대에 배치됐다.
부대의 구조도 익숙지 않은 첫날, 중공군의 대반격이 시작됐다. 2만7000명에 이르는 ‘인(人)의 장막’이 설마리 지역을 에워쌌다. 이날 전투는 6·25전쟁을 통틀어 중공군의 최대 공습이었다. 하지만 글로스터연대는 4000여 명에 불과했다.
임진강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이 가장 많이 희생된 전투였다. 140명이 죽고 900명이 다쳤다. 로즈 이병을 포함해 포로가 526명이나 됐다. 참패였지만 이들의 항전이 없었다면 중공군은 5월이 되기 전 서울을 함락했을 것이다.
보급병이던 로즈 이병은 쉴 새 없이 고지를 오르내리며 탄약과 식량을 날랐다. 사흘째인 4월 24일, 본부중대의 창고는 탄약 한 발, 식량 한 점 없이 깨끗이 비었다. 이튿날 오전 10시 긴급명령이 떨어졌다. “뿔뿔이 흩어져라!” 그리고 대규모 퇴각이 시작됐다. 하지만 사방은 이미 중공군 천지였다.
중공군은 포로들을 이끌고 북으로 올라갔다. 포로들에게 지급된 음식이라곤 무슨 씨앗 같은 것뿐이었다. 포로들은 그걸 ‘새 모이’라고 불렀다. 5월 15일 압록강변의 한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 열아홉 밤을 걸었다.
○ 아무런 기약 없던 포로생활
포로수용소라지만 철조망이나 감시초소 따위는 없었다. 그저 민가였다. 나중에 이곳은 ‘벽동포로수용소’로 불렸다. 화장실이라도 가려면 모두 일어나야 할 정도로 좁은 방에 10명씩 수용됐다.
마을 중간 중간 중공군이 보초를 섰다. 탈출은 어렵지 않았지만 시도하는 이는 드물었다. 마을을 빠져나가면 바로 평지여서 숨을 곳이 없었다. 더욱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랐다. 한 장교는 7번 탈출했지만 모두 붙잡혔다.
붙잡히면 동굴 같은 곳에 갇혔다. 처음에는 5일, 그 다음은 7일 하는 식으로 수감 기간이 늘어났다. 동굴에서 풀려나면 다른 포로들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도록 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북한군 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곳 생활은 더욱 끔찍하다는 소문이 흉흉했다.
식사는 하루 한 끼만 제공됐다. 재료를 알 수 없는 가루였다. 한 번은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자 포로 400여 명에게 고작 닭 6마리가 나왔다. 몸이 아프다고 하면 갈색 가루약을 줬다. 그래도 낫지 않으면 그 다음은 흰색 가루약이었다. 어디가 아프든 약은 똑같았다.
63kg이었던 로즈 이병의 몸무게는 몇 달 새 38kg이 됐다. 벽동수용소에서만 동료 30∼40명이 숨졌다. 그가 목격한 것만 그랬다.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가 풀려난 것은 1953년 8월 16일, 정전협정 체결(7월 27일) 20일 만이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오는 데 한 달 보름이 걸렸다.
○ 잊히지 않는 기억들
지난달 말 영국 런던 근교의 로즈 씨 집을 찾았다. 작은 정원이 딸린 단층짜리 주택이었다. 이제 78세인 로즈 씨에게 포로생활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물었다. 로즈 씨는 한참을 망설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짧게 말했다. 잠시 뒤 그는 다시 입을 뗐다.
“포로수용소를 향해 밤마다 행군을 할 때였지. 중공군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게 됐어. 그들에게 식사가 나왔어. 그중 한 명은 양 손이 모두 없더군. 그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었는지는 몰라. 더는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날이 1951년 4월 27일이지.”
로즈 씨가 어렵사리 끄집어낸 60여 년 전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는 빛바랜 수첩을 꺼내왔다. 수첩에는 수용소에 있던 동료들의 이름과 계급, 입대일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따금 노래 가사도 있었다. “왜 이런 걸 적었느냐”고 묻자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불안해 죽을 것 같았다”고 했다. 수첩 중간 부분이 찢겨 있었다. 중공군이 뭘 적었는지 알아본다며 찢어갔다고 했다. 그의 삶의 한 부분도 그렇게 찢겨 있는 듯 보였다.
인터뷰 내내 부인 재키 로즈 씨(70)는 옆에서 손뜨개질을 하거나 낱말 맞히기를 했다. 하지만 남편 얘기에 한순간도 귀를 떼지 않았다. 부인은 남편의 포로수용소 얘기를 처음 듣는다고 했다. 느낌을 묻자 “끔찍하다”고 짧게 말했다. 그녀는 남편의 아픔을 더는 들추지 않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결국 ‘당시로 다시 돌아가면 참전하겠느냐’는 질문의 답을 듣지 못하고 로즈 씨의 집을 나섰다. ▼환청… 공황장애… 끝나지 않은 ‘노병의 전쟁’ ■ 6·25참전 용사들 만나보니 정찰중 부하 잃은 볼러 씨 불꽃축제가 폭격소리로 들려▼
포격에 팔 부상 사익스 씨 공포에 짓눌려 밤마다 악몽 지난달 말 영국 런던의 군 복지시설인 유니언잭클럽에서 한국전참전용사회(BKVA) 노병들을 만났다. 이들은 인터뷰에 앞서 모두 기립해 특별한 의식을 보여줬다.
마이크 스윈델스 회장(80·예비역 육군소장)이 “유엔헌장 아래 한국전쟁에 참전해 자유를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친 우리 친구들을 기억한다”라고 선창했다. 이어 다른 참석자들이 일제히 “신 앞에서 어느 한 사람도 잊히지 않는다(Not one of them is forgotten before God)”라고 화답했다.
BKVA가 모임을 열 때면 어김없이 행하는 의식이다. 영국은 6·25전쟁에 모두 1만4198명의 지상군을 파병했다. 이 중 1078명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들의 의식은 불귀의 객이 된 동료들은 물론 지금도 전쟁의 악몽에서 고통 받는 전우들을 위한 것이다.
이 자리에 참석한 존 볼러 씨(78·당시 소위)는 1951년 12월 21일 경기 연천군 고왕산 인근으로 정찰을 나갔던 일을 잊지 못한다. 부하 3명을 이끌고 적의 동태를 살피던 중 중공군 20여 명과 맞닥뜨렸다. 부하 한 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눈앞에서 벌어진 그 장면은 그에게 전쟁의 상흔으로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그로부터 58년이 흐른 지난해 12월 31일 밤, 폭격 소리에 놀란 볼러 씨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진격 앞으로!” 창밖에선 새해를 맞는 불꽃 축제가 한창이었다. 그는 한동안 그렇게 창가에 서 있었다고 한다.
잭 사익스 씨(77·당시 일병)는 1952년 11월 25일 적군을 생포해오라는 명령을 받고 중공군 진지로 향하다 포탄 공격을 받았다. 오른쪽 팔이 타들어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처음에는 팔을 잘라야 할지 모른다고 했다. 다행히 지혈이 돼 잘라내진 않았지만 신경이 끊어져 엄지손가락을 영영 쓸 수 없게 됐다.
사익스 씨는 15년 전부터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한곳에 오래 머물 수 없어 늘 움직여야 했다. 어둠을 피해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집 밖으로 뛰쳐나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악몽이 심해진다”고 말했다. ▼6·25참전 英 전함 ‘벨파스트’ 벽엔 숨진 장병 3명 이름이…▼
영국 런던 템스 강의 상징인 타워브리지 옆에는 거대한 전함이 있다. 길이가 187m로 타워브리지 높이(80m)의 2배가 넘는다. 1938년 진수된 이 전함은 영국 해군의 자존심으로 통하는 벨파스트(Belfast)다.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도 유일하게 건재했던 전함이다.
벨파스트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비롯해 모두 4차례 실전 배치됐다. 그중 가장 오랜 기간, 그리고 마지막에 참여한 전투가 6·25전쟁이었다. 1971년 10월 템스 강에 전시된 벨파스트는 한 해 24만여 명이 찾을 정도로 런던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다.
지난달 말 ‘매우 특별한 가이드’와 함께 벨파스트를 찾았다. 로널드 야들리 씨(78)는 이 전함을 타고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가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어른 스무 명이 들어가기 힘든 작은 예배당이었다. 예배당 벽에는 전쟁 중 숨진 장병 3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갑판에 적의 포탄이 떨어졌소. 통신병이던 나는 전함 맨 아래층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 당시 상황을 직접 보진 못했지만, 엄청난 굉음이 들리더군. 우리는 북한의 한 외딴섬에 이들을 묻어줬소. 다신 누구도 찾아가보지 못했지만….”
벨파스트 곳곳에는 당시 승조원들의 생활을 보여주는 밀랍인형이 설치돼 있다. 치과 앞을 지나던 야들리 씨는 “나도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드릴이 낡아 엄청 아팠다”며 인상을 잔뜩 구겼다. 럼주를 배급해주는 곳에 이르러서야 야들리 씨의 표정이 환해졌다. 단조로운 선상생활의 유일한 낙이었단다. 수술실을 지날 때였다. 한 관광객이 야들리 씨에게 “혹시 승조원이었느냐”고 물었다. “이 배를 타고 6·25전쟁에 참전했다”는 그에게 관광객은 기념사진을 함께 찍자고 요청했다. 그는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쫙 폈다. 6·25전쟁 참전 무공훈장이 노병의 가슴에서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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