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드레우의 ‘아이러니’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3월 5일 03시 00분


48억달러 재정감축 통해 ‘그리스 체제개편’ 승부수
아버지 이름으로 총리 올라 아버지 유산 깨기 나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총리 직에 올랐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깨는 작업에 나섰다.”

그리스 정치명문가(家) 출신인 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총리(58·사진)가 아버지가 세운 그리스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해체하기 위한 대장정에 나섰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이 4일 보도했다.

파판드레우 총리는 3일 48억 달러 규모의 재정적자감축안을 발표했다. 공무원 봉급 삭감, 연금 동결, 부유층 소득세 인상, 사치품에 과세, 술·담배·연료세 인상 등 기득권층은 물론이고 노동계층의 반발을 무릅써야 하는 정치적 결단이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유럽증시는 일제히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파판드레우 총리는 그리스 재정위기 속에서 정부비용 삭감과 세금인상 등 비(非)포퓰리즘 프로그램을 내놓고 있지만 여론조사에서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얻고 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그리스를 재정 적자에서 구하는 것뿐 아니라 정치권의 부패와 조세 회피 풍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파판드레우 총리의 집안은 그리스의 ‘케네디가’로 불린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각각 그리스 총리를 두 차례, 세 차례 연임했다.

특히 1974년 그리스에서 군부정권이 무너진 후 정권을 잡은 아버지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총리는 1980, 90년대 그리스 정계를 10년 가까이 지배해 왔다. 민주정치와 국민통합의 상징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지만 방만한 국가재정 운용과 정치적 스캔들로 오늘날 그리스 위기를 낳은 장본인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그의 아들인 파판드레우 현 총리는 1967년 군부 쿠데타로 할아버지가 총리에서 실각하고 아버지가 망명을 떠났던 미국에서 태어났다. ‘아메리카나키(amerikanaki·작은 미국인)’란 별명으로 불리며 어린 시절을 스웨덴 캐나다 등지에서 보냈고 애머스트대(미국)와 런던정경대(영국)에서 국제정치와 사회학을 공부했다. 정치평론가들은 파판드레우 총리가 일찍부터 조국을 떠나 글로벌 감각으로 조국 그리스를 객관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앞으로 더 과감히 개혁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유럽연합(EU) 정상회의에 참가해 “그리스 재정위기의 중심에는 ‘시스템의 부패’가 만연해 있다”고 적나라하게 자국 문제를 까발리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리스의 정치부패와 비효율을 제거하고 좀 더 높은 유럽 기준에 맞춰 ‘남부 유럽의 덴마크’가 되도록 만들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리스 경제산업연구재단의 야니스 스투나라 이사장은 “파판드레우 총리가 노조와 연금수령자들은 물론이고 기득권층의 반발을 물리치고 과거 유산을 부순 자리에 자신의 유산을 세워 나갈 시점”이라고 말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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