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휴스턴의 한 에너지회사에 근무하는 제니퍼 하비 씨(40)는 ‘센서스(인구조사) 2010’ 질문지를 읽고 난감해졌다. 출신과 인종을 묻는 8, 9번 문항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헷갈렸던 것. 백인 엄마와 의붓아버지 품에서 자란 그는 생부(生父)가 흑인과 쿠바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흑인인 남편과 결혼해 딸 세 명을 낳았다. 네 살배기 막내딸 사마리는 자신을 흑인이라 굳게 믿고 있다.
다양한 인종이 하나로 융해되는 진짜 ‘용광로’ 시대가 오는 걸까. 최근 미국에서는 다인종 시대를 넘어 무(無)인종 시대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역대 23번째 인구조사는 이를 확인하는 첫 시험대가 될지 모른다. USA투데이는 이달 초 “하비 씨처럼 많은 미국인이 인종을 묻는 항목에서 자기 탐구(soul-searching)의 시간을 겪게 됐다”고 보도했다. 2000년 후 10년 만에 이뤄지는 인구조사는 15일부터 1억3500만 가구를 대상으로 진행된다. 이번부터 질문지는 영어 외에 스페인어 중국어 등으로도 작성됐다.
케네스 존슨 뉴햄프셔대 사회학과 교수가 10일 발간한 미국 내 인종 현황에 대한 보고서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났다. 존슨 교수는 “조사 결과로 추정할 때 이번 세기 중반까지 미국은 소수인종이 다수인종으로 바뀌는 국가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으로 오는 이민자 중 가임기의 히스패닉 여성이 대거 유입되고 있기 때문. 히스패닉 여성의 평균 출산율(2.99명)은 백인(1.87명) 흑인(2.13명) 아시아인(2.04명)에 비해 높은 편이다.
소수인종 간 결혼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도 원인이다. USA투데이에 따르면 2000년 이후 두 인종 이상이 섞인 혼혈은 2000년 700만 명에서 최근 4500만 명으로 껑충 뛰었다. 만약 이런 경향이 지속된다면 다음 세대는 자신을 다인종 또는 무인종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브루킹스연구소의 인구통계학자 윌리엄 프레이 씨는 이를 “인종에 신경 쓰지 않는 색맹”이라고 표현했다. 흑인 엄마와 파나마 출신 흑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세실리오 팔라시오 군(18)은 “구직할 때 인종을 묻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며 “인종을 드러내놓고 싶지도 않지만 숨기고 싶지도 않다. 중요한 건 내가 누구인지일 뿐”이라고 말했다.
차별받는 게 두려워 거짓으로 인구조사 질문지를 작성했던 소수인종의 태도도 달라지고 있다. 아랍계 미국인 사이에서는 인종을 묻는 질문에 ‘아랍계’로 표시하는 캠페인도 전개하고 있다. ‘똑바로 표기합시다. 당신은 백인이 아니에요’라고 불리는 이 캠페인은 “테러 위협이나 차별에 노출되는 게 두려워 ‘백인’이라고 표시했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뉴스위크 인터넷판이 최근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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