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숙자의 죽음’ 10대들 가슴 울리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4월 1일 03시 00분


美서 ‘이웃들의 관심’ 사후 확인

“이름도 성도 몰랐다. 집도 가족도 없는 철저한 외톨이. 그가 세상을 버렸듯, 세상도 그를 버린 줄 알았다. 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는.”(내털리 보던 양의 편지에서)

전미노숙자원조연맹(NAEH)에 따르면 2007년도 기준 미국 전체 노숙자는 67만여 명. 그들 대부분은 길 위에서 신원미상인 채 흔적도 없이 삶을 마감한다. 그러나 지난해 12월 숨진 한 명의 신원미상인은 3명의 10대 아이들 가슴에 영원히 남았다고 미 머큐리뉴스가 지난달 30일 보도했다.

캘리포니아 주 새너제이에 사는 보던 양(17)과 케이틀린 퍼낸 양(18), 하비에스 모랄레스 군(17)이 ‘그’를 만난 건 3년 전 버스정류장이었다.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 낡아빠진 옷과 샌들을 신은 그는 한눈에 봐도 노숙자였다. 중학생이 된 들뜬 기분에 보던 양은 주머니 속 잔돈을 내밀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건 “싫어”란 날선 목소리. “그때 그 슬픈 푸른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어요.” 값싼 동정은 상처가 되기도 한다는 걸 보던 양과 친구들은 깨달았다.

그 뒤 아이들은 그와 친구가 되기로 했다. 그가 사는 880번 도로 밑 바스컴 가를 지날 때마다 알은척했다. 다정함을 표하고자 ‘예수 아저씨(Jesus Man)’란 별명도 지었다. 언제나 고개를 숙인 채 외면하던 아저씨. 퍼낸 양이 건넨 인사에 슬쩍 손을 올린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온갖 번뇌를 짊어진 듯 미소 한번 비추지 않았다. 그런 아저씨를 보며 모랄레스 군은 세상을 원망했다. “아저씨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사회가 그를 버린 거죠. 각박한 동네 인심이 밉기도 했어요. 어린 우리밖에 친구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지난해 12월 18일. 아저씨는 그렇게 길 위에서 숨을 거뒀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채.

하지만 아이들의 원망이 놀람으로 바뀌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경찰이 찾은 아저씨의 유품엔 새 옷과 신발, 담요와 돈이 가득했다. 모두가 동네 주민들이 놓고 간 것이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대부분 쪽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제발 좀 그냥 쓰세요. 동정으로 이러는 게 아닙니다. 당신도 우리 이웃이니 나누고 살자는 겁니다.”

석 달이 지난 지금도 그가 살던 바스컴 가의 한 나무엔 십자가가 걸려 있다. 마분지를 오려 만든 ‘당신을 그리워하며’란 팻말도 있다. 보던 양은 그 나무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주민을 여럿 봤다. 퍼낸 양은 “우리가 친구였고 주민들이 그를 아낀 이웃이란 게 자랑스럽다”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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