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금융 → 긴축재정 실패 → 부도… ‘9년전 아르헨’ 전철 우려
시장 불신받는 그리스
긴축재정안에 시민 반발
구조조정 잘 이행될지 의문
유로존 지원승인 진통 클듯
EU체제의 모순
경제규모 다른데 단일환율
나라별 비상대응에 한계
‘위기’ 쉽게 전염될 우려도
《그리스 의회가 6일(현지 시간) 1100억 유로(약 161조 원)의 구제금융을 받는 조건으로 긴축재정안을 통과시켰지만 글로벌 금융시장은 안정을 되찾기는커녕 오히려 더 심하게 요동치는 모습이다. 이번 사태가 같은 남유럽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거쳐 유럽 전역으로 번질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남유럽 재정위기가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으로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제2의 금융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유로화 체제의 모순이 부른 위기
그리스 의회는 6일 세금 인상, 공무원 급여 삭감, 연금 삭감을 골자로 하는 긴축재정안을 표결에 부쳐 찬성 172, 반대 121로 가결했다. 앞서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은 2일 그리스에 1100억 유로를 지원해 주는 구제금융에 합의했다. 이는 당초 예상했던 지원액인 450억 유로의 2.4배에 이르는 규모로 2012년까지 만기가 돌아올 그리스 국채(800억 유로)를 모두 막고 그동안 생기는 재정적자까지 보전할 수 있는 금액이다.
구체적인 지원안이 나오고 그 규모도 예상보다 훨씬 커졌는데도 세계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져든 것은 남유럽 재정위기가 구제금융으로 해결될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그리스 사태는 1999년 출범한 유럽경제통화연맹(EMU)에 따른 ‘유로화 체제’의 모순을 드러낸 하나의 사건일 뿐이며 EMU의 본질적인 한계는 여전하다는 시각이 금융시장에 팽배해 있는 것이다.
이흥모 한국은행 해외조사실장은 “당초 국제금융시장은 그리스가 대외채무를 상환할 수 있느냐에 관심이 있었지만 일단 구제금융으로 급한 불을 끌 것으로 보이니까 EMU 체제가 과연 지속 가능한지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의문에 주목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은은 이날 보고서에서 EMU 체제에 대해 △단일환율 적용으로 역내 국가 간 불균형 심화 △단일 통화정책과 국가별 재정정책 체제의 모순 △경상수지 적자 회원국에 관용적 태도 △EMU 체제의 동요 시에 대비한 비상대책의 부재 △전염효과에 취약 등 5가지 구조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 구제금융이 그리스를 구원할까
전문가들은 그리스에 대한 구제금융이 제대로 집행될지에도 의문을 품고 있다. 구제금융안은 합의됐지만 800억 유로를 지원할 유로존 내 15개국의 의회 승인 절차가 남아있다. 각국이 지원안 통과에 진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그리스는 당장 19일까지 85억 유로의 국채를 상환해야 한다.
김위대 국제금융센터 부장은 “그리스 대외 부채 중 51%의 채권국인 독일 프랑스가 지원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구제금융에 합의하고도 지원이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유로존 정상들은 7일(현지 시간) 벨기에 브뤼셀에 모여 위기 확산을 막기 위한 대응책을 논의하고 그리스 구제계획을 확정하기로 했다.
그리스가 구제금융을 받더라도 IMF가 내건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중간에 구제금융이 중단될 가능성도 있다. 그리스는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공무원 임금을 삭감하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데 상당수 국민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2000년 3월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도 이듬해 12월 국가부도 사태에 직면한 아르헨티나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 세계 신용경색 우려, ‘유로존 붕괴’ 최악 시나리오도
그리스가 부도위기를 피한다 하더라도 이른바 ‘PIGS’ 국가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비롯해 유로존 다른 지역의 문제는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위기감도 높아지고 있다.
세계 최대 채권투자회사인 핌코의 모하메드 엘에리언 최고경영자(CEO)는 CN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그리스 재정위기가 다른 국가들로 확산되기 직전”이라며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미국도 전염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신용평가회사 무디스도 그리스를 뒤덮고 있는 채무 위기가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아일랜드 영국 등의 은행 시스템을 해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리스 등 유럽 국가의 상황이 악화돼 국가채무 불이행 사태로 전개될 경우 금융회사들이 투자자금을 회수하면서 국제금융시장이 심각한 신용경색에 빠질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종규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EU 국내총생산(GDP)의 8.5%를 차지하며 유로존 내 4위권인 스페인으로까지 문제가 번진다면 유로 체제에 대한 근본적 논의가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앞으로 국제금융시장의 문제는 민간의 부채가 아니라 공공 부문의 부채이며 경제회복만으로는 공공부채 위기를 해소할 만큼의 충분한 세수(稅收)가 창출되지 않을 것”이라며 “그리스 사태는 빙산의 일각일 뿐 진짜 위기는 이제 시작”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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