泰정부 ‘강제해산’ 최후통첩정부 최후통첩 방송에도 시위대 수천명 현장 안떠나방콕시민 “우리도 좀 살자”탁신일가 계좌 등 동결
17일 오후(현지 시간) 태국 방콕 도심 한가운데 반정부 시위대(UDD·일명 레드셔츠)가 마지막 거점으로 삼고 있는 랏차쁘라송 교차로 일대. 도로 한가운데 세워진 연단에서는 정부의 강경진압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연단 뒤에는 이번 시위 과정에서 숨진 시위대의 사진과 ‘우리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평화로운 시위대’라는 내용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연설을 듣던 집회 참가자 수백 명은 때론 박수를 보냈고, 때론 “살인 행위를 멈춰라” “끝까지 싸우자”고 외치며 정부를 성토했다.
정부가 이날 오후 3시까지 현장을 떠나라고 시위대에 ‘최후통첩’을 한 뒤 “되도록 빨리 해산 작전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혀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돌았다. 이곳에서는 “정부가 해산작전을 미루면 전국에서 시위대가 더 모여들어 ‘게릴라식’ 시위를 벌일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결단을 내릴 때가 됐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정부의 경고와 한낮 기온이 섭씨 35도를 넘나드는 무더위 속에서도 이곳을 점거한 시위대 5000여 명(정부 추산)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위대 점거 지역의 남쪽 끝인 라마4 거리에서는 이날 밤 시위대가 주유소에서 뺏은 연료탱크에 불을 지르려는 것을 군이 저지했으며 간간이 총성이 들리기도 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도심 떠나라”“살인 멈춰라”… 유혈사태 악화일로
13일 외신과의 인터뷰 도중 피격된 반정부 시위대의 강경파 지도자 카띠야 사와스디폰 소장이 이날 오전 9시 20분경 끝내 숨졌다는 소식이 시위대를 격분하게 했다.
지난달 초부터 시위대가 점거하고 있는 랏차쁘라송 사거리 주변 약 2km 지역에는 시위대가 폐타이어와 대나무, 집기, 쓰레기 등을 쌓아서 만든 거대한 바리케이드가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방콕포스트 등 현지 언론은 “시위대가 성(城)을 쌓았다”며 이 지역을 ‘붉은 도시’라고 이름 붙였다. 또 랏차쁘라송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에는 군경이 설치한 철조망도 있어 시가전 현장을 보는 듯했다. 총으로 무장하고 방탄복을 입은 군인들은 삼엄하게 경계를 서며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 일촉즉발의 ‘붉은 도시’
오토바이로 승객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 택시’ 운전사에게 통사정을 해서 우여곡절 끝에 랏차쁘라송 거리에 진입했다. 진입로에는 각 지방에서 올라온 시위대들이 지방별로 천막 아래 누워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부분 탁신 친나왓 전 총리의 출신 지역인 북쪽 지방이나 저소득층과 농민이 많은 동북부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무더위 속에 한 달 반 동안 수천 명이 노숙생활을 하다 보니 악취가 코를 찔렀다.
랏차쁘라송 거리에 도착한 뒤에도 집회 현장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검은색 제복을 입은 시위대 소속 경비요원들이 일일이 출입자의 신분을 확인하고 있었다. “지휘부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그들은 설명했다.
정부의 탄압을 우려해 성은 공개하지 않고 이름만 밝힌 시위 참가자 위라윳 씨(27·여행가이드)는 “유일한 해결책은 군대를 철수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것뿐”이라며 “이번에 만약 실패하더라도 우리 뜻이 이뤄질 때까지 다시 모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뙤약볕 아래 앉아 집회에 참가하고 있던 한 60대 여성은 “2008년에 옐로셔츠(친정부 단체)가 공항을 점거했을 때는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이번에 우리가 도로를 좀 막았다고 해서 총을 쏘고 감옥에 보내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항변했다.
현지 TV에서는 “오후 3시까지 현장을 떠나지 않으면 최고 2년의 징역과 4만 밧(약 140만 원)의 벌금을 부과하겠다”는 정부 성명이 하루 종일 반복해서 방영됐다. 하지만 어린이와 노약자를 포함해 현장을 벗어난 사람은 드물다고 시위 참가자들은 전했다. AP통신은 “13일 이후 시위대 37명이 사망했고 카띠야 소장의 사망으로 양측의 충돌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에 앞서 17일 오전 1시경에는 룸피니 공원 인근에서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공군 소속 병사 1명이 머리에 총을 맞고 숨져 이번 사태의 첫 군인 희생자가 됐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정부는 이 지역의 물과 전기를 끊고 생필품 보급을 금지했다. 시위대 검거지역 안에서는 휴대전화도 연결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시위대가 버틸 수 있는 것은 노점상들이 물과 빵, 과일 등 생필품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문을 닫은 상가에서 전기를 끌어와서 앰프와 선풍기 등을 틀고 있는 모습도 목격됐다.
○ 시위로 고통받는 시민들
현장에 서 있는 군경과 시위대 못지않게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주변 시민들이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들지 모르는 불안 속에 버스와 전철 등 대중교통 운행이 금지돼 일상에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컴퓨터회사에 다니는 뽕다랏 다마띠야 씨(34)는 “처음에는 시위대를 지지했지만 이제 지쳤다”며 “정부가 시위대를 해산시킬 거면 빨리 하든지, 아니면 정부를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화장품 수입사업을 하는 한 교민은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일반 시민들”이라고 토로했다.
한편 이번 사태를 총괄 지휘하는 비상사태대응센터(CRES)는 반정부 시위대의 자금줄을 끊기 위해 이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기업과 개인 등의 106개 계좌를 동결한다고 밝혔다. 계좌가 동결된 명단에는 시위대의 실질적 지도자인 탁신 전 총리 일가를 비롯해 친(親)탁신 성향의 정치인과 기업, 시위대 지도부 등이 포함돼 있다.
본보 장택동 기자 방콕 르포 will71@donga.com
■ 피격 닷새 만에 숨진 카띠야는? ‘레드셔츠’ 이끌어온 강경파 현직 장성 도피중인 탁신 前총리와 친밀
피격 닷새 만인 17일 끝내 숨진 태국 반정부 시위대(UDD·일명 레드셔츠)의 지도자 카띠야 사와스디폰 소장(사진)은 반정부 시위가 본격화된 3월부터 현직 장성의 신분으로 시위대에 합세해 사실상 시위를 총괄해왔다. 특전사령관을 지낸 그는 진압군인들과 싸울 수 있도록 시위대를 훈련시켰으며, 바리케이드 설치도 직접 지휘했다. 지난달 10일 태국군이 시위를 진압하려다 25명의 사망자와 800여 명의 부상자를 내고 실패했던 것도 카띠야 소장이 배후에 있었기 때문으로 당국은 보고 있다.
레드셔츠 안에서도 대표적 강경파로 분류돼 온 그는 전투적 언행과 돌출 행동으로 항상 뉴스의 중심이 돼 왔다. 그는 온건파 레드셔츠 지도자들을 향해 정부와 결탁했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정부에 대항할 ‘인민군’ 창설을 촉구하기도 했다. 특히 친정부 시위대인 ‘옐로셔츠’에 수류탄을 투척하겠다는 등의 과격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현재 도피 중인 탁신 친나왓 전 총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카띠야 소장은 13일 오후 시위장소인 방콕 랏차쁘라송 거리 일대에서 외신기자와 인터뷰를 하던 중 수차례의 총성과 폭발음이 들린 직후 머리에 총상을 입고 병원으로 이송됐으며,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전 숨졌다. 피격 경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시위대는 정부가 배후라며 시위 강도를 높여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