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5월 미국 국방부는 미군 병사용 베레모 60만 개를 전량 회수해 처분했다. 이유는 단 하나. 중국에서 만든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 미국 EP-3첩보기가 중국 인근 상공에서 피랍된 직후 냉랭해진 미중 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고는 해도, 400만 달러어치 베레모를 허공에 날려 버리고도 아까워하지 않는 미국의 자존심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9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미 워싱턴에 자리한 국무부 건물 지하에는 기념품 상점이 있다. 흰머리독수리가 올리브 잎과 화살을 양 발에 움켜쥔 그림의 국무부 문장이 새겨진 셔츠, 커피잔, 테디베어 인형, 컴퓨터 가방 등 다양한 물품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 하나는 성조기 배지다. 옷깃에 달 수 있도록 핀이 부착된 이 평범한 성조기 배지가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중국제이기 때문이다. 더욱 재미있는 건 이 배지를 담은 조그만 비닐봉지 겉면에는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라는 검은색 글씨가 선명하다.
'메이드 인 차이나 없이 살아보기' 같은 이벤트가 세계 각국에서 벌어질 정도로 메이드 인 차이나의 파급력이 거센 현실에서 중국제 성조기 배지는 자연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9년 전 수십억 원의 혈세를 낭비하면서까지 자존심을 지키려 했던 미국이, 그것도 심장부 국무부에서 중국산 성조기 배지를 수입해 판매한다는 건 얄궂은 일이다.
이 같은 내용을 3일 전한 미 국제관계전문 격월간지 포린폴리시 인터넷판은 "과거 국방부처럼 (성조기 배지들을) 모두 회수하자는 것은 아니다"며 "다만 이 배지를 착용한 사람들은 자신이 세계화의 상징을 달고 있다는 점을 깨닫기 바랄 뿐"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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