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불경죄’ 장군의 전역식은 성대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7월 26일 03시 00분


예포 17발… 게이츠 국방 아쉬움 담은 연설… 특수부대원 전투복 도열

23일 오전 4시(현지 시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포시즌스호텔 1622호. 객실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자 백발의 노신사가 고단한 몸을 일으키며 졸린 눈을 힘겹게 뜬다. 다름 아닌 로버트 게이츠 미국 국방장관이다. 18일 미 워싱턴을 출발해 한국과 인도네시아에서 5박 6일의 강행군을 했지만 워싱턴에서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 기다리고 있다.

바로 스탠리 매크리스털 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사령관이 34년간 정들었던 군복을 벗는 날이다. 잡지 ‘롤링스톤’과의 인터뷰에서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과 현 정부의 아프간 정책을 비난하는 취지의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돼 아프간 사령관 직에서 전격 해임된 바로 그 사람이다. 게이츠 장관의 전용기인 E-4B는 장장 20시간을 날아 메릴랜드 주에 있는 앤드루스 공군기지에 내렸다.

워싱턴 포트맥네어에서 열린 매크리스털 전 사령관의 전역식은 37.7도를 넘나드는 폭염 속에서 치러졌다. 하지만 이날 전역식은 ‘불경죄’ 때문에 군복을 벗는 군인의 마지막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성대하게 치러졌다. 17발의 예포가 매크리스털 전 사령관이 걸어온 빛나는 발자취를 반추하듯 웅장하게 울려 퍼졌고 의장대 사열도 있었다. 그가 지휘했던 부대의 특수부대 요원들은 행사용 정복이 아닌 전투용 위장복(BDU)을 입고 행사장을 지키는 파격을 연출했다.

4성 장군 진급 후 3년이 지나지 않아 전역할 경우 중장으로 강등시킨다는 군 내규에도 불구하고 미 국방부는 그의 별 하나를 빼앗지 않았다. 군 관계자는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에서 가장 용감하게 희생을 아끼지 않은 군인에 대한 마지막 예우”라며 “전역을 가져온 말실수 하나가 조국에 대한 희생을 지워버릴 수는 없다”고 말했다.

“자카르타보다 훨씬 더 덥다”며 가볍게 시작한 게이츠 장관의 연설은 이내 가장 존경받는 ‘진짜 군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부심과 슬픔을 담아 감히 그를 떠나보낸다”며 “미국은 그에게 커다란 빚을 졌다”고 말했다. 게이츠 장관은 “몸 바쳐 지키려던 국가의 감사와 장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한 군인이 이제 긴 여정을 마치려 한다”며 “그는 가장 위대한 전사로 남을 것”이라고 했다. 평생을 국가안보회의, 중앙정보국 등 외교안보 부처에서 바쳐온 게이츠 장관은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듯했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묘한 표정으로 연단에 오른 매크리스털 전 사령관은 군인으로서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기 위해 연병장에 선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회한에 잠긴 듯했다. 하루 5시간 이상을 잔 적이 없고 식사는 두 끼 이상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절제된 생활을 하면서 살아온 30년 세월이었다. 버거킹이나 맥도널드 같은 패스트푸드점이 전투 의욕을 저하시킬 수 있다며 아프간 바그람 기지에 있는 것을 폐쇄할 정도로 전쟁의 승리를 위해 매진했다.

그는 “오늘 전역을 택함으로써 나는 내가 이루고자 했던 목표를 완수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국가에 대한 봉사의 길을 중단하게 됐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이 길을 다시 걷는다 해도 내 결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자신이 걸어온 군인의 길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조금씩 목이 메어오기 시작한 이 야전군인은 “나는 사람을 믿었고 사랑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며 “현재와 미래의 지도자들에게 군인으로서 국가를 위한 봉사하는 것은 위대한 일”이라고 말했다.

절도 있게 올라간 그의 손은 네 개의 별이 새겨진 검은 베레모의 오른쪽에 꽂혔다. 때마침 지기 시작한 석양에 비친 그의 눈이 반짝였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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