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문화혁명으로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20년 뒤엔 톈안먼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 됐다.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헤지펀드 매니저로 명성을 쌓았으며 이제는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의 유력한 후계자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넷판은 30일 역사의 고비마다 극적인 반전을 거듭한 이 40대 중국인의 삶을 집중 조명했다.
WSJ는 “올해 44세의 펀드매니저 리루(李路)가 버핏의 유력한 후계자로 떠오르고 있다”며 “역발상과 가치투자를 중시하는 리 씨의 투자철학도 버핏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보도했다. 올해 80세인 버핏 회장은 아직까지 은퇴 의사를 밝히진 않았지만 자신이 하던 투자업무를 2, 3명에게 나눠주는 방식의 후계구도를 오래전부터 구상해왔다. 리 씨가 이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란 뜻이다.
리 씨의 삶은 시작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그가 한 살도 채 안 됐을 무렵 기술자였던 아버지는 문화혁명으로 숙청돼 탄광으로 끌려갔고 어머니도 강제노동 캠프에 들어갔다. 리 씨는 이때부터 이집 저집에 맡겨지며 입양생활을 시작했다. 부모가 없는 학창시절은 싸움과 방황의 연속이었지만 이를 안타깝게 지켜본 할머니의 노력으로 마음을 다잡아 난징대에 입학했다.
리 씨 인생의 물줄기를 또 한 번 바꾼 것은 1989년 톈안먼 사태였다.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규합하고 단식투쟁에도 나선 그는 데모가 무력진압될 즈음 미국으로 망명해 컬럼비아대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버핏 회장과의 인연은 1993년 우연히 대학 교정에서 그의 강연을 들었을 때 시작됐다. 리 씨는 “중국에서 살 때는 금융시장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지만 그의 강연을 들은 후 주식시장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극복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학비 마련을 위해 혼자 주식투자를 해 적지 않은 돈을 번 리 씨는 졸업 후엔 아예 자신의 투자회사를 차렸다. 그는 인권운동가로서의 전력을 이용해 버크셔의 찰스 멍거 부사장을 비롯해 부유한 투자자를 상당수 모았다. 비록 아시아 외환위기 등으로 손실도 여러 번 겪었지만 1998년 이후 펀드의 연환산 수익률이 26.4%나 될 만큼 실적이 준수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잘나가는 중국계 펀드매니저’였던 리 씨가 결정적으로 버핏 회장의 눈에 든 것은 2008년. 그해 리 씨는 자신이 이미 투자해 재미를 보고 있던 중국의 전기자동차 기업 비야디(BYD)를 멍거 부사장에게 추천했고 이에 버크셔는 2억3000만 달러를 BYD에 직접 투자했다. 지금 이 주식의 평가액은 원금의 6배가 넘는 15억 달러로 불었다. 리 씨의 조언이 투자에 있어 친환경 에너지를 중시하는 버핏 회장의 철학과 정확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WSJ는 리 씨의 버크셔 합류 가능성에 대한 버핏 회장의 직접적인 코멘트를 싣지는 않았다. 하지만 멍거 부사장의 발언을 인용해 “리 씨가 조만간 회사의 최고투자책임자 자리 가운데 하나를 차지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리 씨는 “내가 버크셔의 이너서클이 된 것은 엄청난 행운이며 이는 꿈에서도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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