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포효하는 중화제국]아편전쟁 굴욕 상징 임칙서…170년만에 굴기의 영웅으로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0월 2일 03시 00분


“과거의 아픔 잊지 말자” 유배지-아편 폐기한 곳… 중화민족주의 교육장 변모

아편 폐기한 곳에 임칙서 동상 중국 광둥 성 둥관 시 ‘아편전쟁 및 임칙서기념관’의 임칙서 동상. 청나라 말기 영국의 아편 수출을 막으려 온몸을 던졌던 그는 아편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유배의 길을 떠났지만 중국이 다시 급부상하면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둥관=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아편 폐기한 곳에 임칙서 동상 중국 광둥 성 둥관 시 ‘아편전쟁 및 임칙서기념관’의 임칙서 동상. 청나라 말기 영국의 아편 수출을 막으려 온몸을 던졌던 그는 아편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유배의 길을 떠났지만 중국이 다시 급부상하면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둥관=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1840년 당시 패권국인 영국이 일으킨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는 중국인이 가장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역사다. 이를 시작으로 국토가 찢겨나가고 반(半)식민지까지 가는 치욕을 100년 남짓 겪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 170년간 절치부심 ‘칼’을 갈아온 중국은 이제 과거의 중국이 아니다.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갈등과 환율 분쟁에서 보듯 패권을 행사하려는 모습이 엿보인다.

이 와중에 새롭게 조명되는 인물이 ‘외세침략에 맞선 중화민족의 위대한 영웅’으로 불리는 임칙서(林則徐·1785∼1850)다. 그는 아편 근절이라는 청나라 황제의 명을 받고 광둥(廣東) 성 광저우(廣州)로 내려가 영국에서 수출한 아편을 모조리 몰수해 불살랐다.

하지만 아편전쟁에서의 패배로 그는 광저우에서 2만 리나 떨어진 중국 북서부 오지인 신장(新疆)위구르 자치구의 이닝(伊寧)으로 유배를 가야 했다. 외세에 무릎 꿇은 청 왕조만큼 수모와 굴욕의 길이었다.

지난달 29일 기자가 베이징(北京)에서 3000km를 날아가 도착한 이닝은 “과거의 치욕을 잊지 말자”며 중화민족주의를 고양하는 애국기지로 바뀌어 있었다. 시내에 건립된 임칙서기념관에는 ‘애국주의 교육기지’ ‘국방교육기지’ 등 7개의 팻말이 붙어 있었다. 기념관 관계자는 “이곳은 시내 초중고교생이면 매년 한 차례 방문하는 곳”이라며 “지난해에만 11만 명이 다녀갔다”고 설명했다. 인근 도시에서 온 고교생 량잉(梁潁·17) 양은 “역사수업 때 배웠지만 기념관에 와 사진과 유물을 접하니 중화민족의 아픔이 새삼 다시 느껴진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168년 전 ‘설움과 회한’을 가슴에 품고 유배생활을 했던 임칙서지만 지금은 중국 전역은 물론 화교가 사는 해외에서도 영웅이다. 그의 기념관이나 동상은 아편전쟁 사적지인 광둥 성 광저우, 둥관(東莞), 마카오는 물론 고향인 푸젠(福建) 성 푸저우(福州), 심지어 해외인 미국 뉴욕에도 건립돼 있다.

같은 날 기자가 찾은 둥관 후먼(虎門) 진의 ‘아편전쟁 및 임칙서기념관’. 1990년 이후 2000만 명이 다녀간 곳이다. 입구 안쪽 왼편에 가로세로 약 50m의 연못이 2개 있다. 임칙서가 1839년 6월 영국 상인에게서 압수한 아편을 호수 물과 소금, 소석회를 이용해 용해시킨 뒤 바다로 흘려보낸 곳이다. 당시 압수한 아편은 무려 1188t으로 폐기하는 데만 23일이 걸렸다.

기념관은 현재 1년 반 일정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이고 있다. 광저우 시는 다음 달 열리는 아시아경기대회를 앞두고 올해 7월 새로 조성한 공원을 ‘임칙서 공원’으로 명명했다. 앞서 중국과학원은 1996년 6월 화성과 목성 사이에서 발견한 공전 주기 4.11년의 새로운 소행성을 ‘임칙서 별’로 이름 지었다. 아편전쟁 당시 영국 해군에 맞서 포를 쏘았던 후먼의 사자오(沙角) 웨이위안(威遠) 등의 포대(砲臺)는 이제 유적지와 관광지로 바뀌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부르짖는 중국 굴기(굴起)의 시대를 맞아 ‘지하의 임칙서’는 민족의 영웅으로 새롭게 추앙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인민을 병들게 하는 영국의 아편 수출에 맞서 분연히 일어섰다가 결국 좌절한 임칙서. 하지만 이날 기자가 바라본 그의 동상은 주장 강 위에서 170여 년 전의 아편 선박이 아니라 중국을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시킨, 끝없이 오가는 대형 무역선박을 자랑스러운 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광저우·둥관=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이닝=이헌진 특파원 mungchi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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