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17기 5중전회)에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돼 2년 후 최고지도자를 예약한 시진핑(習近平·57·사진) 국가부주석도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고위간부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입당을 거절당했다.
푸젠(福建) 성 외국어대 교우회는 2003년 푸젠 성과 인연이 있는 인물들의 글을 모은 ‘푸젠 성 박사의 풍모’라는 총서를 편찬했다. 첫째 권에는 381명의 글이 실렸는데 여기에 시 부주석은 1969년 베이징(北京)에서 산시(陝西) 성 옌촨(延川) 현의 량자허(梁家河) 마을에 내려가 농민들과 7년간 생활한 내용을 ‘자술(自述)’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다.
시 부주석의 아버지 시중쉰(習仲勛)은 국무원 부총리를 지내던 1962년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마오쩌둥(毛澤東)의 미움을 사 직위를 박탈당하고 감시와 억류의 세월을 보내다 1978년에야 완전히 복권됐다.
지식청년대에 소속돼 이곳에서 하방(下放)활동(문화대혁명기 지식인의 농촌 활동)은 했지만 정식으로 중고등학교 교육을 받지 못한 시 부주석은 대학도 간신히 진학했다고 소개했다. 1975년에야 부친에 대한 처분이 다소 완화돼 칭화(淸華)대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
시 부주석은 어려서부터 부친에게서 사람들과의 인화 단결을 강조하는 말을 들었는데 량자허에서 체험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7년간의 농촌 생활에서 가장 큰 소득은 실질적인 것과 실사구시가 무엇인지, 군중(민중)이 무엇인지 알았고, 나에 대한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다는 점 두 가지가 가장 큰 소득”이라고 밝혔다. 당시 생활하던 농촌은 외진 곳으로 주위에 일가친척도 없었기 때문에 믿을 것은 그들과의 단결뿐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대학에서 마르크스 이론과 사상을 배우고 법학박사를 받았지만 농촌의 시장화 건설, 빈곤 탈출,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중국 농촌건설과의 관계 등의 정책을 펴는 것과 관련된 많은 경험은 옌촨에서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일반 백성이야말로 공산당으로서는 옷과 음식을 주는 부모와 같은 존재”라며 “인민의 공복임을 굳게 마음에 새기고 인민이 배부른지 추운지 따뜻한지 등을 항상 마음에 두어야 한다”고 적었다.
량자허에서 춥고 배고프게 지냈던 시 부주석은 후에 푸젠 성장 등을 지낼 때 이곳이 여전히 가난한 것을 알고 전기가 공급되도록 주선했다. 또 푸젠 성 기업인들에게 량자허를 위해 기부하도록 하는 등 도움을 주며 당시의 인연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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