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중산층 날개없는 추락… 실직 50대 흑인여성의 절규

  • 동아일보
  • 입력 2010년 11월 20일 03시 00분


《 “ 연봉 10만달러 마케팅 중역서 월수입 1000달러 배달원 신세로 취직은 안되고 통장은 텅텅… 막막한 미래, 신앙마저 흔들린다 ” 》
흑인 여성 크리샌더 워커 씨(50)는 요즘 새벽부터 일어나 요리를 한다. 주문받은 음식을 아침식사 시간에 맞춰 배달하려면 시간에 쫓긴다.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닭고기 요리가 타지는 않았는지, 푸딩 모양이 망가지지는 않았는지 신경을 써야 한다.

워커 씨는 지난해 초까지만 해도 1년에 10만 달러를 벌던 중산층이었다. 대학에서 보건복지학을 전공한 뒤 플로리다 주 포트마이어스의 한 재활 및 간병 전문기관에서 일해 온 전문직 여성이었다. 2007년에는 마케팅, 재정, 인사와 홍보까지 책임지는 중역으로 선임됐다.

하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를 피할 수 없었다. 해고된 뒤 수없이 직장을 알아봤지만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 결국 정장 대신 앞치마를 둘렀다. 올해 초부터 한 접시에 10달러 안팎의 돈을 받고 음식을 만들어 배달하고 있다. 연 수입은 1만1000달러로 쪼그라들었다. 그동안 저축은 바닥이 났고, 건강보험의 방패막이도 사라졌다.

싱글맘이기도 한 워커 씨는 순식간에 직면한 빈곤의 문턱에서 발버둥치는 흑인여성의 대표적 사례다. 18일 워싱턴포스트의 취재에 응한 그는 “내가 연기 자욱한 주방에서 이런 처지에 놓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 전에는 등에서부터 발끝까지 타고 내리는 갑작스러운 통증 때문에 응급실에 가기도 했다.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고 했다.

그녀의 18세 고등학생 딸은 엄마의 음식 배달을 도우며 집 근처 대형 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에너지 회사에서 은퇴한 70세 친정아버지도 생계를 위해 트랙터 운전수로 다시 일을 시작했다. 경제적으로 힘들다 보니 가정을 지탱해주던 독실한 기독교 신앙도 흔들리고 있다. 워커 씨는 “친구들이 ‘주님의 음성을 들어보라’고 조언해줄 때 나는 ‘싫어, 각종 고지서부터 처리해야 해’라고 응수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쯤이면 다시 일터로 돌아갔어야 했다. 내 이력서가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느냐”며 고개를 숙였다. 워커 씨의 실업수당은 다음 달로 기한이 끝난다.

워커 씨처럼 중산층에서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미국인이 계속 늘고 있다. 최근 미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미국 내 빈곤층 비율은 14.3%로 50년 내 최고치로 증가했다. 플로리다 주에서만 지난 한 해 32만3000명이 빈곤층으로 전락해 전체 빈민이 270만 명으로 늘어났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의 삶은 더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 흑인의 평균 수입은 4.4% 감소했다. 백인보다 3배나 줄어든 것. 4인 가정 기준으로 수입이 빈곤층 기준(연 2만1756달러 이하)에 못 미치는 흑인 가정은 지난 한 해에만 7%가 늘어났다. 이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은 이제 깨어진 꿈이다.

전미도시연맹(NUL)의 마크 모리얼 대표는 “흑인들의 삶은 달리는 기차의 맨 끝 화물칸에 탄 신세”라며 “(경제)기차가 빠르게 달릴 때는 문제없지만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떨어져 나간다”고 말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