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리크스, 美외교전문 25만건 공개 파문… 美정부-의회 “무책임” 강력 비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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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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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국왕 “美, 이란 공격해야” 서방국가-아랍권 비밀외교 폭로

위키리크스가 이번에 공개한 외교 전문 가운데 국가 최고 기밀사항인 ‘극비(top secret)’라고 찍힌 문서는 없었다. 하지만 1만1000여 건은 ‘비밀(secret)’로 분류됐고 9000여 건은 ‘외국 정부에 공개 불가 문서(NOFORN)’로 돼 있다. 4000여 건은 ‘비밀’인 동시에 ‘외국 정부에 공개 불가’ 문서로 지정됐다.

공개된 전문에서 핵 개발 문제로 서방국가와 첨예한 갈등을 빚어온 이란을 둘러싸고 미국 등 서방국가와 아랍권이 벌인 비밀 외교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란 핵문제와 관련해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은 2008년 4월 당시 라이언 크로커 주이라크 미국대사와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미 중부군 사령관(현 아프가니스탄 주둔군 사령관)과의 면담에서 “미국이 이란을 공격해야 한다”고 말했다. 압둘아지즈 국왕은 이란 외교장관을 면전에 두고 “당신 나라의 사악함을 면하게 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할 정도로 이란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로버트 게이츠 장관은 올해 2월 프랑코 프라티니 이탈리아 외교장관과의 회동에서 “앞으로 몇 달 안에 이란 핵문제에 진전이 없다면 우리는 중동 핵 확산을 감수해야 하고 이스라엘 또는 양쪽의 공격에 따른 중동전쟁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기부자들이 여전히 알카에다 같은 테러단체의 최대 재정후원자라는 사실을 거론하고 중국 정부 공작원이 미국과 동맹국을 겨냥한 사이버 공격에 가담했다고 지적했다.

위키리크스의 전문 공개에 대해 미 정부와 의회는 무고한 생명을 위협하고 실정법을 위반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프라티니 장관은 이번 공개에 대해 ‘외교의 9·11테러’가 될 것으로 우려한다면서 국가 간 신뢰에 타격을 주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편 위키리크스로부터 미리 외교전문을 받아 보도한 영국 가디언지는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국무부 외교 전문의 출처는 허술한 미 국방부 내부전산망”이라고 밝혔다. 국방부가 9·11테러 이후 정보공유를 활성화하기 위해 구축한 내부전산망 ‘Siprnet’에 연결된 컴퓨터와 패스워드를 갖고 있거나 ‘기밀’ 수준 정보에 대한 사용 허가를 받은 미군과 국무부 공무원은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 각국 정상들에 대한 현지외교관들 평가 ▼

위키리크스가 공개한 미 국무부 외교 전문에는 각국 정상들에 대한 현지 외교관의 적나라한 평가도 많이 포함돼 있다. 뉴욕타임스는 “공개된 외교 전문은 세계 전역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관에 의한 유례없는 뒷거래와 각국 지도자들의 거칠지만 솔직한 입장, 핵과 테러범의 위협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보여 준다”고 보도했다.

2008년 말 미국 대사관이 보내온 전문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의 관계를 ‘배트맨(푸틴)과 그의 조수 로빈(메드베데프)’으로 표현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푸틴의 상급자이지만 ‘배트맨 푸틴의 조수 로빈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란의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대통령은 ‘히틀러’로 표현했고 푸틴 총리를 ‘무리 가운데 가장 지배적인 남성’을 뜻하는 ‘알파 독(Alpha Dog)’으로 지칭하는 표현도 있다. 또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해 미 외교관들은 ‘무기력한 늙은이(flabby old chap)’로 묘사했다.

프랑스 주재 미 대사관은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수차례에 걸쳐 총리와 내각을 질책한 사실을 들며 “다른 사람의 비판과 모욕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권위주의적인 성향이 있다”고 평가했다. 또 엘리자베스 디블 이탈리아 주재 미 대사관 대리대사는 이탈리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에 대해 “유럽의 지도자답지 않게 무기력하고, 자만심이 강하며, 일처리도 비효율적”이라고 혹평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위험을 회피하고 그렇게 창의적이지 못하다”는 평가와 함께 비판을 잘 견뎌낸다는 뜻으로 ‘테플론 메르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테플론은 음식이 들러붙지 않도록 프라이팬 등에 칠하는 물질로 타격을 입지 않는 정치인을 부를 때 비유하는 말이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보낸 전문은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을 “어떤 사실에는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을 반대하는 아주 괴상한 얘기나 음모를 전달하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휘둘리는, 극도로 허약한 남자”로 표현했다. 아라비아반도의 알카에다 지부가 있는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에 대해선 “남을 무시하길 잘하고 지루하게 만들며 또 참을성도 없다”고 보고 전문에 적혀 있다. 이 밖에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에 대해 “미친 늙은이에 불과하다”는 보고가 있었고,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에 대해선 “아주 이상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최영해 특파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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