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홀브룩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특사(69·사진)가 10일 국무부 청사에서 쓰러져 구급차편으로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현재 위중한 상태라고 미 국무부가 11일(현지 시간) 밝혔다. 홀브룩 특사는 대동맥 파열로 수술을 받았다.
홀브룩 특사는 직업 외교관으로 장관을 제외하고 누릴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예를 누린 드문 인물.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1977∼1981)와 유럽담당 차관보(1994∼1996) 등 2개의 다른 지역에서 차관보를 지냈다. 1995년 크리스토퍼 힐 전 동아태 차관보와 함께 보스니아 내전을 종식시킨 데이턴 평화협정을 성공으로 이끌며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1999년부터는 2년 동안 유엔 주재 미국대사로 활약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국무장관으로 유력하게 거론됐지만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밀렸고 2004년 대통령 선거기간에는 존 케리 민주당 후보의 외교안보 가정교사로 활동하면서 국무장관 자리를 노렸지만 케리 후보의 패배로 기회를 잃었다. 그는 2008년 대선에서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외교안보 참모진 좌장으로 활동하면서 클린턴 대통령 당선 시 외교장관 1순위로 불렸지만 경선 패배로 꿈을 접어야 했다.
홀브룩 특사는 클린턴 장관이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 임명되면서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업무를 전담하는 특사로 임명됐다. 홀브룩 특사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가장 대표적인 재승박덕(才勝薄德)형 인물로 평가한다. 너무 머리가 비상하고 아는 것이 많아 부하직원이 보스로 모시기 가장 어려운 인물로 불렸고 깐깐한 업무태도와 잦은 핏대 세우기로 사람들의 인심을 잃은 경우가 많았다는 것.
아프간·파키스탄 특사로 활동하면서도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간 대통령을 안하무인으로 대해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기도 했다. 카르자이 대통령은 홀브룩 특사와 아예 대화 자체를 꺼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홀브룩 특사는 최근 위키리크스의 외교전문 폭로로 많은 고민을 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카불 주재 미국대사관이 국무부에 보낸 전문은 카르자이 대통령을 귀가 얇은 허약한 지도자로 묘사했다.
그는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특히 1977년부터 1981년까지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로서 10·26사태 직후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에서 진행되는 정치일정에 관여했고, 12·12쿠데타 직후 당시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에게 신군부의 권력 강화 움직임을 견제하는 입장을 취하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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