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오른쪽)과 장제스가 1945년 8월 28일부터 10월 10일까지 충칭에서 국-공 담판을 벌일 당시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은 당시 40여 일간 8차례 만나며 항일 공동 투쟁 등을 논의했다. 사진 출처 원후이보
중국 대륙의 패권을 겨뤘던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전 중국 국가주석과 장제스(蔣介石·1887∼1975) 전 대만 총통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한 글이 중화권 인터넷에서 화제다. 런민(人民)일보 인터넷판 런민망의 한 블로거가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먼저 마오 전 주석이 낭만적이고 유머가 있으며 외모 등 소소한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 반면 장 전 총통은 냉정하고 엄숙하며 격식과 외부로 드러난 모습을 중시하는 등 차이가 있었다. 붓글씨도 마오는 호방한 반면 장은 규격을 중시했다. 마오가 전략에 능하고 파벌을 싫어한 반면 장은 전술에 강하고 파당조직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차이도 많지만 유사점도 적지 않다며 10가지가 제시됐다. 먼저 물과의 인연. 마오의 후난(湖南) 성 사오산(韶山) 시 고향집 10여 m 앞에 작은 두 개의 연못이 있었고 마오는 베이징(北京)의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목욕을 즐겼다. 장도 저장(浙江) 성 시커우(溪口) 진 고향집 앞 10여 m에 작은 시내가 있고 대만으로 탈출한 후 동해안에서 줄곧 살았다.
옛 소련과의 인연도 유사했다. 장이 옛 소련 전문가의 도움으로 황푸군관학교를 세우는 등 혁명 중 교류가 있었고 마오도 신중국 수립 후 대규모 공업기지 건설에 옛 소련 기술진의 도움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장남 장징궈(蔣經國)와 마오안잉(毛岸英)을 옛 소련에 보내 수년간 지내게 했다.
두 사람 모두 19세기 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曾國藩)을 존경했으며 ‘총구로 권력을 잡은 점’이 유사했다. 종류는 달라도 기독교(장)와 공산주의(마오)를 평생 고수했다. 1949년 장은 대만으로 갔으나 대륙 회복을 꿈꿨고 마오는 대만 정복을 노리는 등 모두 ‘중국은 하나’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장은 마오푸메이(毛福梅)에서 쑹메이링(宋美齡)까지 네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마오 역시 공식적으로 공포되지 않은 고향의 첫 부인과 정식 부인 양카이후이(楊開慧), 허쯔전(賀子珍), 그리고 ‘혼인 미등록’의 장칭(江靑) 등 4명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 관련 ‘약법(約法·약속 법) 3장’도 있어 쑹메이링은 결혼할 때 장에게 기독교를 믿을 것을 요구하고 자신은 아이를 낳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으며 정부의 어떤 관직도 맡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해 서약을 받았다. 장칭은 당으로부터 ‘허쯔전이 정식으로 (부인에서) 삭제되지 않았으니 부인으로 행세하지 말 것’ 등을 요구받았다. 끝으로 두 사람의 사망은 나이가 여섯 많은 장이 1년 빨랐으나 건강은 1972년 초 비슷한 시기에 나빠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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