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20일 방북 중인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를 통해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사찰단의 복귀와 핵 연료봉의 북한 외부 반출 의사를 내비친 것으로 알려졌다. 영변 핵시설에 대한 IAEA 사찰단 복귀와 핵 연료봉 반출은 최근 미국에서 열린 한미일 3국 외교장관 회담이 중점적으로 논의한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위한 전제조건에 해당하는 내용. 당시 3국 외교장관은 이 두 가지 내용 외에 북한이 호전적인 도발행위를 즉각 중단할 것과 2005년 9·19 공동성명에서 밝힌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를 실질적으로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증명해야 한다는 내용 등에 합의했다. 3국 외교장관은 회담 직후 이런 합의 내용을 중국과 러시아에도 통보했다.
미국 정부는 리처드슨 주지사가 미국으로 복귀해 정부에 공식 브리핑을 하지도 않은 상태이며 동행한 CNN 앵커를 통해 전언 형태로 전해진 내용이라 아직 공식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특히 북한이 핵 사찰단 복귀를 약속했다고 해도 영변 핵시설에 대해 무제한의 사찰 허용인지, 일회성이 아닌 상주사찰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또한 현재 두 갈래로 진행되고 있는 플루토늄 프로그램과 우라늄 농축시설에 대한 사찰을 모두 포함하는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미국 정부로서는 북한이 사찰 수용이나 핵 연료봉 반출에 합의하기 위해 내놓을 전제조건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리처드슨 주지사가 전한 내용을 통해 북한의 진정성을 판단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나서 “비핵화는 김일성 전 주석의 유훈(遺訓)”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지만 진정한 비핵화에 착수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북한을 신뢰하지 않는 요인 중 하나다.
한국 정부는 리처드슨 주지사가 미국으로 돌아가 행정부에 보고하고 이를 다시 우리 정부에 설명해 오면 그때 가서 내용을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라며 신중한 반응을 보였다. 정부 당국자는 “자신들이 원하는 곳만 보여준다는 식의 사찰단 복귀는 받아들일 수 없다”며 “또 일회성 사찰이라면 오히려 평화적으로 핵을 개발하고 있다는 선전에 이용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우라늄 농축을 위한 핵 연료봉 외국 반출 등도 추가 협상을 복잡하게 만들면서 시간을 버는 전형적인 ‘시간 끌기’ 전술일 가능성이 높다.
김영선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정부가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 파악하고 있지 않아 공식적으로 평가하기는 이르다”고 전제하면서도 “북한의 비핵화 의지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이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길 수 있을지의 문제”라고 말했다.
12월 말이면 뉴멕시코 주지사에서 물러나 초야로 돌아가는 리처드슨 주지사는 대북 평화의 메신저를 자임하는 인물. 1990년대 두 차례 특사 자격으로 방북해 당시 억류됐던 미국인 석방을 이끌어냈고 6·25전쟁 당시 사망한 미군 유해발굴협상단을 이끌면서 북한 문제에 관여했던 경험을 토대로 북한과의 채널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8월 북한에 억류됐던 아이잘론 곰즈 씨의 석방교섭 당시 특사 자격으로 방북하겠다고 지원했지만 북한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낙점’하면서 방북이 무산됐던 경험이 있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서해상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북한이 우라늄 농축 등 새로운 핵위협의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서 자기 과시욕이 강한 정치인인 리처드슨 주지사가 북한을 방문하는 것에 호의적인 평가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리처드슨 주지사는 현지 기상사정으로 하루 늦은 21일 오전 평양을 출발해 중국 베이징에 도착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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