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사태로 국제유가가 연일 고공행진을 벌이는 가운데 1970년대 전 세계를 불황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오일쇼크’가 다시 한 번 현실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석유 전문가들은 최근 잇따라 최악의 유혈사태로 치닫고 있는 리비아 사태의 불길이 중동의 주요 산유국으로 번지면 국제유가가 지금보다 2배 이상 폭등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전 세계에 매장된 석유의 80%가량을 차지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특히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석유 생산을 늘리겠다는 의사를 밝힌 만큼 이번 사태가 오일쇼크로 확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나온다. ○ 최악: 유가 배럴당 150∼220달러
최근 유가 급등 사태가 오일쇼크로 이어질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이번 사태가 과거 ‘1·2차 오일쇼크’와 유사하다고 지적한다. 최근 리비아를 포함한 북아프리카와 중동 상황이 ‘정정 불안→원유 생산 차질→국제유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과거 오일쇼크의 전개 과정과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국제유가 급등의 진폭과 기간은 북아프리카를 휩쓸고 있는 ‘재스민 혁명’이 어디까지 확산되느냐에 달려 있다. 특히 중동의 바레인은 이번 사태를 이슬람권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뇌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 국민의 30%에 불과한 수니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바레인에서는 최근 시아파를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바레인에서 수니파 정권이 전복되면 수니파의 본거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개입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시아파의 본산인 이란의 맞대응을 불러올 수 있다.
세계 석유 생산의 12%를 책임지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5.3%)까지 정치 불안의 태풍에 휩싸이면 오일쇼크는 불가피하다. 전문가들은 이 경우 현재 배럴당 100달러 수준인 국제유가는 200달러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실제 일본 노무라증권은 이날 보고서를 내고 최악의 경우 유가가 올해 220달러까지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으며 골드만삭스는 150달러를 넘을 것으로 전망했다.
제3차 오일쇼크가 현실화되면 세계경제는 물가가 오르면서 경기가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석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물가 불안이 더욱 극심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못지않은 경기침체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 중간: 유가 100∼110달러
‘재스민 혁명’의 바람이 수에즈 운하를 넘지 못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일단락될 수도 있다. 이때도 국제유가는 리비아와 알제리의 석유생산 차질로 당장은 상승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하루에 158만 배럴을 생산(일일 산유량 120만 배럴 감소)하는 리비아와 함께 현재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고 있는 알제리(하루 127만 배럴 생산)까지 석유생산을 전면 중단하면 단기간 석유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요 산유국이 증산에 나서면 올 하반기에는 다시 하락세로 돌아설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 경우 올해 평균 유가는 배럴당 100∼110달러 수준으로 소폭 상승하는 데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이 경우에도 세계경제는 어느 정도 부침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 국제유가 급등세가 단기간 계속되면서 신흥국에 머물던 글로벌 인플레이션이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으로 확산되면서 글로벌 경제의 회복세가 둔화될 가능성이 높다. ○ 최선: 유가 90달러
가장 낙관적인 시나리오는 리비아 사태가 예상보다 빨리 마무리되는 경우다. 극심한 정치 불안 끝에 정권이 교체된 튀니지와 이집트는 전 세계 석유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0.1%와 0.9%에 불과해 석유공급에 큰 타격을 주지 않는다. 특히 OPEC의 대부 격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이번 사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하루 1250만 배럴의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현재 800만 배럴 정도만 생산하고 있다. 필요하다면 400만 배럴 증산을 단기간에 할 수 있는 것이다.
알리 알나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은 23일(현지 시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OPEC 회원국은 원유 생산량을 늘릴 용의가 있다”며 유가 불안사태 진화에 앞장설 수 있다는 의지를 전했다. LG경제연구원 이광우 선임연구원은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주요 산유국의 추가 생산능력이 충분하다”며 “연평균으로 보면 국제유가는 배럴당 90달러 후반 정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 브렌트유 119달러로 껑충… 다우 107P↑ ▼
중동 사태에 따른 유가 불안심리로 영국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이 올해 들어 세계 3대 유종 가운데 처음으로 120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주요 글로벌 금융회사들은 유가가 배럴당 150∼220달러까지 치솟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아 3차 오일쇼크에 대한 우려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국제 금융시장은 이틀째 심하게 요동쳤고 2월 국내 소비자물가도 정부의 마지노선인 3%대를 훨씬 넘는 5%에 육박할 것이라는 전망이 정부 내부에서 나오고 있다. 24일(현지 시간) 런던 석유거래소(ICE)에서 거래되는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이 전날 110달러를 돌파한 데 이어 이날 오전 9시 현재 배럴당 119.79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2008년 8월 22일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며 두바이유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브렌트유 세계 3대 유종 중에 가장 높은 가격까지 올랐다. 또 이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되는 4월 WTI 역시 배럴당 103.41달러로 2008년 9월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일본 노무라증권은 23일 보고서를 통해 “리비아 알제리가 석유 생산을 동시에 중단하면 유가가 배럴당 220달러까지 상승할 수 있다”고 밝혔다. 노무라증권의 마이클 로 애널리스트는 “리비아 알제리의 석유 생산 중단 시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하루 평균 석유 생산량이 210만 배럴로 감소할 것이며 이는 유가가 배럴당 147달러까지 치솟았던 2008년 여름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의 골드만삭스 역시 “리비아 사태가 진정되지 않는다면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중동 국가의 원유 생산에도 영향을 미쳐 국제유가가 2008년 수준을 넘을 것”이라며 150달러까지 상승할 것으로 경고했다.
이에 따라 세계 주요 증시는 23일 급락해 뉴욕 증시의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이틀째 100포인트 이상 폭락했고 유럽 각국의 주가도 나흘째 하락세를 나타냈다. 다우지수는 23일 전날보다 107.01포인트(0.88%)나 떨어진 12,105.78로 마감했고 같은 날 런던증권거래소의 FTSE 100지수는 1.04%, 독일 프랑크푸르트증권거래소의 DAX 30지수는 1.69% 급락했다. 한국은 24일 코스피가 전날보다 11.75포인트(0.60%) 내린 1,949.88로 작년 12월 1일 이후 처음으로 1,950 선이 무너졌다.
정혜진 기자 hyejin@donga.com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 원유도입 차질땐 석유제품 수출 중단 ▼ 정부 석유수급 비상점검회의… 비축유 180만배럴 추가구입
리비아 사태가 중동으로 번져 원유 도입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경우 석유제품 수출을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또 러시아 등에서 대체 도입처를 확보하고 정부의 비축유를 방출해 국내 원유 수급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로 했다.
지식경제부는 24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석유수급 비상점검회의’를 열고 이 같은 위기대응 시나리오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는 정부 관계자 외에도 국내 정유 4사의 원유수급 담당 임원들이 참석했다.
이날 회의를 통해 정부와 정유업계는 앞으로 업계의 원유 재고와 도입 현황을 매일 점검하기로 했다. 지경부 관계자는 “현재 국내로 들어오는 원유의 절반이 석유제품으로 가공돼 다시 나가는 만큼, 이를 조정하면 내수용 원유 확보 효과를 얻을 수 있다”며 “그러나 이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한 것으로 수출 제한에 앞서 대체 도입처 확보와 민간의 원유비축 의무 완화 등 다른 카드를 우선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한국석유공사는 올해 정부의 비축유 구입(60만 배럴)과는 별도로 180만 배럴의 비축유를 추가로 사기로 했다.
정부는 한국이 리비아에서 원유를 수입하지는 않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산 원유 수입 비중을 늘리는 등 수입처를 다변화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한편 기획재정부는 원유 수입 때 부과하는 3%의 관세를 낮추는 방안을 고려 중이다. 재정부 관계자는 “검토는 이미 끝났고 정책적 판단만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으로 유가 고공행진이 계속된다면 재정부는 결국 유류세 인하를 검토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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