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는 원자력발전소 폭발 장면이 계속 나오는데 왜 나에겐 1시간 동안 보고조차 없나.”(15일, 간 나오토 총리)
“문제가 터질 때마다 총리가 기술자를 불러 화를 내는 바람에 현장대응에 방해만 된다.”(12일, 정부 관계자)
초유의 대재앙을 맞아 일본이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런 때일수록 총리부터 일선 공무원까지 일사불란한 위기대응 체제가 절실하지만, 곳곳에서 손발이 맞지 않고 있다. 리더십이 총체적으로 붕괴된 듯하다. ‘매뉴얼 사회’ ‘빈틈없는 정확성’을 신화처럼 간직한 일본이 일본답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일각에선 ‘일본의 재발견’이란 말로 꼬집는다.
○ 기존 리더십 붕괴, 새 리더십 공백
반세기 만의 정권교체로 2009년 출범한 민주당 정권은 아직 확고한 국정 리더십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다. 정권 출범 9개월 만에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가 물러나고 지난해 6월 취임한 간 나오토(菅直人) 총리는 여당은 물론이고 내각조차 장악하지 못했다. 참의원 여소야대로 법안 하나 총리 뜻대로 통과시키지 못하는 ‘불능 정권’이다.
동일본 대지진 발생 직전까지 간 총리는 사퇴 압력에 시달렸다. 지지율은 내려가고 각료들의 정치자금 문제가 연일 터지는 데다 내년도 예산안 통과가 불투명해 정권의 명줄이 ‘오늘 내일’하는 상황이었다. 여당 내부에서도 ‘총리 퇴진’ 목소리가 커지고 야당은 국정에 협조하지 않았다. 대지진 이전에도 이미 ‘일본호 리더십’은 붕괴했던 셈이다.
50여 년 장기 집권했던 자민당 정권 시절에는 국가 리더십을 사실상 관료집단이 쥐고 있었다. 정치인과 재계는 관료와 공생관계를 이루며 일본 사회를 이끌었다. 1980년대 고도성장시대까지는 ‘트라이앵글 동맹’이 일본을 성공적으로 결속시켰다. ‘안정’ ‘안전’ ‘신뢰’ ‘치밀’ ‘친절’ 등 일본의 국가 브랜드는 이 시기에 틀을 다졌다.
냉전체제가 붕괴된 1990년대 이후 20년간 장기 불황이 지속되면서 일본은 새 리더십을 필요로 했다. 전후 복구와 성장이라는 시대적 역할을 다한 자민당은 단독정권이 불가능해지자 연립정권으로 연명했다. 국가 구심점은 점점 약해졌다. 같은 시기 일본의 기업도 인터넷 통신 등 새로운 물결에 올라타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취업난이 극심해지고 사회 전체의 활력이 둔화됐다. 2000년대 초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글로벌 시장경제의 급속한 도입으로 빈부격차가 확대되면서 사회 결속력도 눈에 띄게 약화됐다.
국민의 ‘바꿔 열풍’을 타고 2009년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정치-관료-재계의 3각 동맹을 깨고 정치 주도로 바꾸겠다”고 호언했지만, 분명해진 것은 정치 주도 능력이 없다는 사실뿐이었다. 홀대받은 관료는 정권에 비협조적이다. 재계 또한 민주당 정권과는 서먹서먹한 상황. 경험 부족의 아마추어 정권이 단독 플레이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새 리더십을 보여 주기엔 역부족이다.
○ 매뉴얼 사회의 한계
일본에서 많이 듣게 되는 말이 ‘전례가 없어서 어렵겠다’는 말이다. “규정에 나와 있지 않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일본은 모든 것을 시스템화하기를 좋아한다. 상세한 부분까지 매뉴얼화해 짜놓고 초심자라도 이를 따르면 일이 되게끔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효율 우선주의도 중시됐다. 이런 과정에서 인간의 상상력이나 창의성, 용기는 뒷전으로 미뤄지고 전례를 따르고 규정을 따르는 게 중요해진다. 톱니바퀴로서 정확하게 일을 해내는 것을 요구받았을 뿐, 전체를 총괄하고 아우르는 훈련은 물론이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파격을 서슴지 않는 데는 익숙하지 않게 된 것.
이 같은 ‘매뉴얼 만능주의’는 평소에는 사회의 모든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돌아가게 했지만 임계치 이상의 예상범위를 초과한 문제 해결에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매뉴얼에 익숙해지다 보니 유연성과 창의성이 떨어지고 멀티태스킹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이번 재난에서 피난소 바로 옆 관공서에는 비축 물량이 쌓여 있는데도 공무원들이 많이 실종돼 배급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이재민들이 “식량이 없다. 물 좀 달라”고 아우성치는 일이 벌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 지방 리더십-글로벌 리더십도 흔들
자립도가 높았던 지방자치단체도 리더십의 혼란기를 맞았다. 경제가 좋을 때는 단체장과 지방의회, 지역경제계가 똘똘 뭉쳐 안정된 리더십을 구축했지만, 장기불황 속에서는 밥그릇 싸움이 치열해졌다.
일본이 글로벌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점은 이미 많이 지적됐다. 정글 같은 글로벌 경쟁보다 손쉬운 국내시장에 진력하는 기업도 적지 않다. 과도한 내부 지향과 자체 만족이 결국에는 경쟁력을 갉아먹는다는 지적도 있다. 해외 유학생의 감소는 앞으로도 글로벌 적응력이 쉽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번 원전 사고와 관련해서도 초기에 미국의 기술적 지원 제안을 거부한 것도 유연성을 잃은 리더십의 결과물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후쿠시마(福島) 원전이 지진과 쓰나미 피해를 입은 직후인 11일 미국이 원자로 냉각에 대한 기술적 지원 의사를 밝혔지만 일본 정부와 도쿄전력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 제안을 수용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위기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게 민주당과 일부 정부 인사의 생각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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