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멘 33년 독재도 무릎 꿇었다… 살레 대통령 “연내 퇴진” 튀니지 이집트에 이어 예멘에서도 ‘재스민 혁명’이 성공의 문턱에 들어섰다. 지난달 21일 시작된 시위는 최근 상당수 군 병력이 반정부 시위대에 합류하면서 33년째 집권 중인 예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의 운명을 바람 앞의 촛불로 몰고 있다. 급기야 살레 대통령은 21일 “올해 안에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이날 예멘 수도 사나에서 반정부 시위대에 합류한 군인들이 시민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사나=신화 연합뉴스
‘재스민 혁명’이 세 번째 성공의 문턱에 섰다. 33년째 집권 중인 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21일(현지 시간) “올해 안에 물러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날 AP통신은 무함마드 알수피 대통령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살레 대통령이 정부 관리와 군 간부, 부족 지도자들에게 연내 퇴진 의사를 전달했다”며 “민주적 선거를 통해 후임자를 결정한 후 물러나겠다는 뜻”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튀니지, 이집트에 이어 예멘에도 민주화의 봄이 예고되고 있다.
그러나 살레 대통령은 21일 오후 국영TV에 나와 (자신에게 등을 돌린) 군부가 권력을 쥐려 한다면 내전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으며, 퇴진 시기도 2012년 1월 총선 실시 후에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게다가 반정부 시위대는 여전히 즉각 퇴진을 요구하고 있어 진통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 미국이 먼저 등 돌리고
튀지니와 이집트에 이어 예멘에서 민주화 시위가 시작된 건 지난달 21일이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독재자가 쫓겨나는 걸 지켜본 살레 대통령은 “다시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여러 번 강조하며 각종 유화책을 내놨다. 그러나 야권과 시위대는 즉각 퇴진 요구를 굽히지 않았다. 살레 대통령은 강경 진압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게 악수가 됐다. 18일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 보안대 등의 발포로 52명이 숨지자 미국이 발끈했다. 유혈 진압 소식을 들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존 브레넌 백악관 대(對)테러담당 보좌관에게 “살레 대통령에게 즉시 전화를 걸어 ‘이런 폭력은 용납할 수 없다’고 전하라”고 지시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도 비슷한 반응이었다. 통화 뒤 브레넌 보좌관은 “강력한 어조로 우리 방침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살레 대통령을 묵인했던 건 알카에다 때문이었다. 예멘은 알카에다 아라비아반도지부(AQAP)의 본거지다. 미국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에 따르면 미국은 AQAP를 ‘끈덕진 위협’으로 규정하고 예멘에 경제·군사 원조 명목으로 연간 3억 달러(약 3360억 원)를 지원했다. 그러나 민간인 학살 앞에서는 오바마 행정부도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은 어떻게든 도우려 했지만 살레 대통령 스스로 무덤을 팠다”고 평가했다. ○ 군부 등 돌려 친위대와 대치
미국이 등을 돌리자 군부도 돌아섰다. 육군 제1기갑사단장 알리 모흐센 알아흐마르 장군이 21일 등을 돌린 게 결정적이었다. 알아흐마르 장군은 32년 동안 살레 대통령에게 충성을 바친 그의 오른팔이었다.
알아흐마르 장군이 시위대 지지를 선언하자 장성들도 뒤를 따랐다. 일간 예멘포스트는 “예멘군 60%가 살레 대통령 반대편에 섰다”고 전했다. 이어 예멘 군부는 시위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해 수도 사나를 포위했다. 또 중앙은행과 국방부도 접수했다. 알아흐마르 장군은 시위대 거점인 사나대 인근 광장에 진주했다.
이어 군 수뇌부는 살레 대통령에게 퇴진 압박을 가했다. CNN 보도에 따르면 군 수뇌부는 △대통령은 올해 안에 물러난다 △시위 자유를 보장한다 △유혈 진압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한다 △숨지거나 다친 시위대는 국가가 보상한다 △대통령 본인 및 가족은 주요 직위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을 요구했고 살레 대통령도 이를 받아들였다. 군부는 외교장관을 보내 협상 내용을 아랍에서 ‘왕 중 왕’으로 통하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게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살레 대통령의 아들로서 공화국 수비대 사령관인 아마드는 “아버지가 강압적 퇴진압력에 시달리고 있다”며 CNN 보도를 부인했다. 군부의 쿠데타 움직임에 맞서 살레 대통령은 공화국 수비대에 대통령궁 수비를 지시했다. AFP는 이날 공화국 수비대와 육군 간 교전으로 2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 향후 정국은?
33년 독재체제의 종식은 가시화됐지만 정권교체까지는 적잖은 진통이 예상된다. 살레 대통령은 안전한 퇴임 후 보장 및 영향력 온존을 위해 최대한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고 시위대와 군부는 더욱 강력히 반발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진통이 불가피하겠지만 예멘의 민주화 혁명성공은 전문가들이 진작부터 예상해왔던 바다. 아흐마드 알킵시 전 아랍정치학회 회장은 민주화 시위가 시작되기 전부터 “다음 혁명은 예멘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그는 “예멘은 이집트와 여러모로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모든 상황이 더 나쁘다는 것 뿐”이라고 이유를 댔다.
예멘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다. 230만 인구 중 40%는 하루 생활비가 2달러(2240 원)도 안 된다. 여기에 원유 생산이 줄어들면서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 마실 물이 모자란 것도 예멘 국민들은 불만이었다. 25세 이하 인구 비율(65.4%)도 이집트(52.3%)보다 더 많다.
정치 상황도 이집트보다 복잡하다. 예멘은 300년 넘게 남·북으로 나뉜 분단국이었다. 그러다 1990년 살레 대통령이 이끈 북예멘군이 남예멘을 무력 침공하며 통일에 성공했다. 1994년 다시 내전이 발생했지만 알아흐마르 장군이 제압했다. 그러나 최근 2년 사이에도 남부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됐다. 전국 각지에서 여러 부족이 자치를 요구하는 상황이다. 알카에다의 존재를 감안하면 미국도 가만히 지켜볼 수만은 없다.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는 “미국이 민주주의와 반테러리즘 사이에서 시험대에 올랐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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