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日本 대지진]“목숨은 건졌지만 어떻게 살아갈지…” 교민들 울먹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3월 28일 03시 00분


복구 손도 못대는 센다이… 총영사관 24시간 운영, 600여명 대피시켜

27일 오후 일본 센다이 시내의 한 도로변. 쓰나미가 덮친 지 16일이 지났지만 한국식당의 입간판 앞에는 파손된 자동차들이 어지럽게 방치돼 있다. 센다이=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27일 오후 일본 센다이 시내의 한 도로변. 쓰나미가 덮친 지 16일이 지났지만 한국식당의 입간판 앞에는 파손된 자동차들이 어지럽게 방치돼 있다. 센다이=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지붕 위에 올라간 자동차, 도로에 뒹구는 선박, 앙상하게 형체만 남은 가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사람들….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16일이 지났지만 도호쿠(東北) 지방 중심도시 센다이(仙臺) 시는 여전히 처참한 상태였다. 대지진과 쓰나미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폭격을 맞은 전쟁터도 이보다 더 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는 휴일(27일) 오후였지만 사람들의 얼굴에선 웃음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대지진 초기 국내외 언론사 기자 수백 명이 모여들었지만 후쿠시마(福島) 원전사고 여파로 일주일도 채 안 돼 모두 철수했다. 간간이 구호활동에 동원된 자위대원과 군용차량이 눈에 띄었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해하는 모습이었다. 아직도 본격적인 복구 작업에는 손도 못 대고 있었다.

바닷가로 뻗어 있는 중심도로 양편엔 보름 넘게 치우지 못한 자동차 수천 대가 널브러져 있었다. 곳곳의 교차로에는 신호등이 고장 나 경찰이 빨간 깃발을 들고 수신호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항구에 가까워지자 더 참혹한 광경이 눈길을 잡았다. 폐허로 변해버린 주유소 앞에는 ‘재개불가(再開不可)’라고 크게 쓰인 벽보가 붙어 있고, 기둥만 달랑 남은 편의점은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항구가 눈앞에 보이는 한국 교민의 빠찡꼬 가게는 붕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게 앞에는 손님들이 타고 왔던 자동차들이 뒤죽박죽으로 나뒹굴고 있었다. 가게 주인 김정욱 미야기(宮城)한인상공회의소 고문의 아들 김부기 씨(34)는 “쓰나미가 몰려오는 순간 손님과 종업원들이 아우성을 치며 달아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나마 목숨이라도 건진 게 어디냐”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담장 위에 뒷바퀴가 걸린 승합차 건너편엔 도로 한쪽으로 내몰린 선박이 3, 4척 보였다.

이날 권철현 주일 대사 일행과 함께 도쿄(東京)를 떠나 센다이로 오는 길 자체도 순탄치 않았다. 도호쿠고속도로로 300km를 달리는 동안 노면 수백 곳은 금이 가거나 울퉁불퉁하게 망가져 있었다. 고속도로 제한속도가 50km 이하인 곳도 적지 않았다. 도로변 방음벽이 부서진 곳도 눈에 띄었다.

대지진 피해에 더해 방사성 물질 공포도 주민들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후쿠시마 현에 접어들어 원전사고 지역에서 50km쯤 떨어진 한 휴게소에서 방사능 수치를 쟀더니 2∼4mSv(마이크로시버트)의 방사선량이 측정됐다. 동행한 정규환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 선임연구원은 “인체에 당장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지만 현재 도쿄의 30배쯤 되는 수치”라고 말했다.

센다이 총영사관 2층에 마련된 임시 피난처에는 교민 한귀연 씨(57) 가족 4명이 남아 있다. 600여 명의 교민은 총영사관의 도움으로 다른 지역으로 대피했다. 한 씨는 권 대사의 손을 잡고 “근처 이시노마키(石卷) 시에서 해산물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집과 사업장이 싹 떠내려갔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한숨을 쉬었다. 김정수 총영사(59)와 직원 12명은 16일간 24시간 총영사관을 가동하며 교민들을 도왔다. 첫 4, 5일은 하루 1시간도 자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센다이=윤종구 특파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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