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 적자의 망령’이 일본과 유럽연합(EU)에 이어 미국까지 급습해 세계 경제를 안갯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3대 국제신용평가회사 가운데 하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18일 미국의 재정상황 악화를 이유로 S&P가 미국 정부의 신용등급을 매기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강등했다. 또 다른 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는 1996년 초 같은 이유로 미국의 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강등했다가 정부의 재정안정책 발표 이후 안정적으로 회복시킨 적이 있다.
S&P의 조치로 미국 유럽 아시아 주요 증시는 급락했고 안전자산 선호현상으로 금값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미국의 재정적자로 달러화가 중장기적으로 약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의 지위가 흔들려 세계 경제가 불안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 미국 재정적자 얼마나 심각하기에
미국이 재정적자와 경상적자의 쌍둥이 적자에 시달려온 상황은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국제결제통화인 달러를 찍어내는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 설마 무너지겠느냐는 인식으로 미국의 국가신용등급을 건드리지 않는 게 신용평가회사의 불문율이었다. 일각에서 이번 신용등급 전망 강등을 ‘S&P의 반란’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S&P는 향후 2년 내에 실제 신용등급을 내릴 확률이 최소 33%라고 밝혔지만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은 “미국의 신용등급이 내려갈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며 “이번 조치는 미국 정부의 지지부진한 재정적자 감축에 경고를 보낸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S&P는 현재 127개국 가운데 19개국에 가장 높은 신용등급인 ‘AAA’를 부여하고 있는데 이 중 미국만이 유일하게 ‘부정적’ 전망을 부여받게 됐다.
미국의 재정적자는 2003∼2008년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2∼5%에서 등락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정부 지출이 크게 늘면서 2010년에는 11% 이상 확대된 이후 줄지 않고 있다. 이런 적자가 쌓이며 미국의 국가부채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14조2190억 달러로 GDP의 91.6%에 이른다. 일본(220.3%)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3일 향후 12년간 재정적자를 4조 달러 줄이겠다는 감축계획안을 밝혔지만 민주당과 공화당이 방법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이고 있어 실행될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S&P는 내년 미국 대선과 미 의회 중간선거 때까지 합의에 이르지 못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면서 늦어도 2013년까지 실행계획을 담은 재정건전화 방안이 합의되어야 신용등급 전망을 다시 안정적으로 돌릴 수 있다고 밝혔다. ○ 흔들리는 기축통화로 세계 경제 먹구름
미국의 신용등급 전망 강등 이후 19일 한국의 코스피는 15.04포인트(0.70%) 내린 2,122.68로 선방했지만 중국 상하이종합지수는 1.91% 하락해 6일 이후 처음으로 3,000 선이 깨졌다. 미국 뉴욕증시에서 다우존스산업평균지수가 1.14% 하락했으며 영국 프랑스 독일 증시는 일제히 2%대의 급락세를 보였다.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나타나면서 뉴욕상품거래소에서 6월물 금 선물은 6.90달러(0.5%) 오른 온스당 1492.90달러로 종가 기준으로 사상 최고치를 나타냈다. 미국의 재정적자가 악화돼 위기에 빠질 경우 글로벌 경기침체로 전 세계 석유 수요도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 속에 국제유가도 하락해 뉴욕상업거래소에서 4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2.54달러(2.3%) 하락한 배럴당 107.12달러에 장을 마쳤다. 한편 미국과 유럽 증시는 19일(현지 시간)에는 상승세로 출발했다.
경제전문가들은 이번 조치로 달러의 위상이 더욱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미국 국채의 신뢰 문제와 맞물려 해외 투자자들이 달러자산 비중을 서서히 줄여온 상황에 기름을 붓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중국은 위안화를 국제결제통화로 격상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고 유럽연합(EU)도 유로화의 국제화를 꾸준히 추진하고 있어 달러 약세를 부추길 것으로 전망된다.
함준호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는 “미국 달러를 대체할 기축통화가 나오기는 당분간 어려운 상황에서 안전자산으로서의 달러의 신뢰가 흔들린다면 국제 금융시장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S&P의 조치로 미국 정부가 6월 말까지 시중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2차 양적완화조치(QE2)를 더는 연장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달러 약세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으로 미국 경제가 위축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이번 조치로 한국 경제에 단기적으로는 파장이 크지 않겠지만 유럽과 함께 미국 경제마저 위축될 경우 대미(對美) 수출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뉴욕=신치영 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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