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체르노빌 원전사고 25주년]본보 황규인 기자 ‘재앙의 땅’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1년 4월 25일 03시 00분


피폭자들 “지금도 어디가 아프냐고? 안 아픈곳을 물어달라”

《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25년 전 악몽이 떠오르더군요. 체르노빌 사고 후 자식의 고통을 지켜보다 자살한 엄마도 적지 않게 봤어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사는 신카렌코 한나 씨(62·여)에게 1986년 4월 26일은 운명을 바꾼 날이었다. 체르노빌 원전 근무자들을 위해 지은 계획도시 프리퍄티에 살던 한나 씨는 그날 오후 3시경 원전 직원인 남편과 긴박한 통화를 했다. “큰딸을 데리고 치과에 갈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이른 아침에 원자력발전소에서 불이 났다는 소문이 돌더라고요. 근무 중인 남편이 걱정 돼서 전화를 했더니 ‘폭발사고가 나 사람이 많이 죽었다. 지금 수습되고 있으니 현장에 와서 빨리 도우라’고 하더군요.” 19일 국립 원자력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온 한나 씨는 동아일보 기자와 만나 당시의 상황과 그 후 25년간의 고된 삶을 털어놓았다. 그는 “살던 곳에서 몇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원전이 폭발했지만 사람들은 그저 단순 화재로 생각했다”며 당시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을 전했다. 》
“폭발사고가 난 후에도 경고가 전혀 없다 보니 많은 어린애들이 사고 후에도 놀이터에서 아무 거리낌 없이 놀았어요. 사고 36시간이 지나서야 소련 정부는 대피 버스를 투입했죠. 그때도 ‘사흘이면 돌아올 테니 귀중품만 챙기라’는 얘기뿐이었어요.”


한나 씨가 원전 수습 작업에 참여한 사이 큰딸은 이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한 달이 지난 뒤에야 신문에 실린 행방불명 어린이 명단에 들어 있던 딸의 이름을 보고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큰딸 이리나(38·당시 13세)는 엄마를 보자마자 “배가 아프다”고 했다. 피폭후유증이었다. 딸은 담석 제거 수술을 받았다. 둘째(29·당시 4세)는 지금도 실신과 기절을 반복하고 있으며 셋째(28·당시 3세)는 뼈가 약해지는 병에 걸려 손가락뼈가 부러졌을 땐 잘 붙지 않아 팔목 뼈를 이식해야 했다. 한나 씨 자신도 작업 종료 후 시력과 청력이 약해져 모스크바 요양원에서 한 달간 치료를 받았다. “사람들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아픈 데가 있느냐고 묻는데 사실은 반대예요. 이제는 안 아픈 데가 있느냐고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당시 소련 당국은 프리퍄티 주민 5만 명을 비롯해 원전 30km 이내에 거주하던 35만 명을 강제 이주시켰다. 대부분 25년째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한나 씨 가족도 처음에는 원전 30km 밖에 마련한 슬라브티츠에 살았다. 그러나 곧 키예프로 옮겼다. 남편이 고위 관리의 운전기사로 채용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루블이 휴지조각이 돼 저축액이 날아가면서 생활고가 찾아왔다. 무료진료는 1년에 두 차례로 줄었다. 약값은 대부분 본인 부담이다. “정부에서 1년에 건강 유지비로 120그리브나(1만8000원)를 줍니다. 외부에 철저히 정보를 숨기려고 피폭자들을 극진히 대접했던 소련 시절이 차라리 훨씬 나았죠.”

신카렌코 한나 씨
신카렌코 한나 씨
14세 때 부모님과 함께 체르노빌에서 동쪽으로 35km 떨어진 고향 마을 레드콥카를 떠나 키예프에 정착한 아밀란 발린스카야 씨(38·여)는 “통제구역 밖에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방사성 물질 피해에 시달리며 5년 넘게 법정 소송을 거친 끝에야 피폭자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원자력병원에는 해마다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1만1000명의 신규 환자가 치료를 받으러 온다. 그것도 지역검진소에서 병세가 심각하다고 판단된 경우에만 보내지는 환자들이다. 하사노브 안베르 박사는 “해마다 병원을 찾는 15세 미만 청소년도 4000명이 넘는다”며 “처음엔 유전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체르노빌에서 300km 떨어진 지역 아이들도 갑상샘암 같은 병에 걸려온다. 방사성 물질이 멀리까지 퍼진 탓이다. 지난 20년 동안 인구가 줄어든 나라는 (체르노빌과 인접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뿐”이라고 전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